블로그 운영 중단 및 대표 계정 안내 공지 반디 행사 수첩

안녕하세요, 반디앤루니스 블로그 방문자 여러분.
오늘(2012년 7월 20일)부로 다음, 이글루스, 싸이월드 계정 블로그 운영을 중단합니다.
보다 원활한 컨텐츠 제공을 위해 대표 블로그 중심으로 운영하오니 아래 계정을 참고해 주세요.
그동안 다음, 이글루스, 싸이월드 분점을 방문해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다른 계정에서 만나요!

 


《쓸모 있는 조언》 - 부조리를 보는 법 책, check, 책



 


에드워드 고리 | 《쓸모 있는 조언》 | 미메시스 | 2006


It was already Thursdays,
벌써 목요일이었다.

느닷없이 이야기는 시작됐고, 문장 말미에 찍힌 쉼표는, 늘 그렇듯, 다음으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but his lordship's artificial limb could not be found; therefore, having directed the servants to fill the baths, he seized the tongs and set out at once for the edge of the lake, where the Throbblefoot Spectre still loitered in a distraught manner. He presented it with a length of string and passed on to the statue of Corrupted Endeavour to await the arrival of autumn.
하지만 주인님의 의족은 끝내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하인들에게 목욕물을 받아 두라고 지시를 내리고, 그는 부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곧장 호숫가로 향했다. 그곳에는 아직도 <다리를 떠는 유령>이 정신 나간 모습으로 배회하고 있었다. 그는 유령에게 기다란 실 한 가닥을 주고는 곧장 <좌절된 노력>이라는 이름의 동상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가을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다음 페이지, 그 다음 페이지를 아무리 넘겨보아도 우리가 기대하던 이야기의 가닥은 잡히지 않는다. ‘그’는 분명 어떤 원인으로 다음 행동을 이어가고 있지만 인과는 ‘그’의 내부에 속할 뿐, 우리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찾으려 했으나 찾지 못했던 의족, 목욕물, 부젓가락, 다리를 떠는 유령, 실 한 가닥, 이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이야기를 ‘찾던’ 우리의 기대와 노력은 ‘좌절’ 되었고, 남은 건 이해되지 않는 인과와 그러나 그 안에 버젓이 존재하는 것들이다.

잃어버렸으나 찾지 못했다. 주인님의 의족과 다리를 떠는 유령과 기다란 실 한 가닥이 있다. 기대하고 노력했으나 좌절되었다. 이해가 안 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 다만, 있다. 그리고 기다린다.

어떤 존재, 어떤 마음, 어떤 인상들이 흩뿌려졌다. 그리고 머릿속을 어지럽게 오가는 그것들은, 의미를 찾는 익숙한 습관에 사로잡혀 ‘아직도’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말하자면, 파편화된 조각들을 이리저리 맞춰 보며 어렵사리 큰 그림을 완성해가는 퍼즐처럼, 책 속에 던져진 존재와 마음과 인상을 단서 삼아, 나는 벌써 세상의 어떤 장면들을 그려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각과 조각 사이에 벌어진 틈을 메우고 있는 건, 내가 본 세상이고, 나의 생각이며, 그 자체로 나이기도 하다.

불합리와 불가해, 모순으로 인도하는 부조리 앞에서 나는, 아직도 ‘정신 나간 모습으로 배회하고 있’고, 굳게 응어리져 있는 ‘좌절된 노력’의 그늘 아래 앉아있으며, 합리적이고 이해할 법 한 이야기가 오기를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이게 바로, 에드워드 고리가 나에게 일러준 《쓸모 있는 조언》이다.

- 컨텐츠팀 에디터 현선 (anejsgkrp@bandinlunis.com)





[접어놓은 구절들] 헤르만 헤세, 《헤세의 인생》 접어놓은 구절들

 



헤르만 헤세 | 《헤세의 인생》 | 그책 | 2012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그리고 삶에 매달릴 이유가 적어질수록 점점 더 죽음 앞에서 어리석고 소심해지고 두려워한다. 그리고 점점 더 탐욕스럽고 유치하게 마지막 남은 음식 부스러기에, 마지막 남은 약간의 기쁨에 달려든다. 그리고 사람들은 늘 다시 뭔가를 기대하고, 늘 희망할 이유를 발견한다. 쉰 살 남자의 치명적인 삶의 굶주림이 나 스스로를 번거롭게 하는 지금, 나는 이후의 시간, 비판적인 시절의 저편에 놓여 있는 노년의 평안함과 원숙함을 희망한다. 그러나 나는 정확히 알고 있다. 그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그와 유사한 모든 희망들이 기만이었다는 것이 지금까지 입증되었음을. 우리 같은 사람들을 위한 삶이란 비극적인 사건이며 결코 무해한 것이 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그러나 그렇더라도 나는 희망한다. 이 파도가 거세게 일게 하고, 삶의 충동, 최후의 격동이 미친 듯이 날뛰게 하자!


「도시의 3월」, 1927년


 “치명적인 삶의 굶주림”이라. 이제 겨우 30여 년을 살아놓고선, 왜 이 구절에서 멈춰 서는 거냐. 너는, 앞으로 한참을 더 살아야 쉰 살이고, 쉰 살이 되어도 저 헤르만 헤세의 삶의 통찰, 그 근처에도 가까이 가지 못할 것이다. 그런 주제에, 같잖게도 너는 지금, 그가 말한 ‘삶의 굶주림’에 대해 가벼운 입을 놀려 공감을 표할 심산이냔 말이다. 그러나 성급하게 알은 채 하기 전에 너는 먼저, 스스로에게 답을 구해야 할 것이다. 내 생에 한번이라도 진실로 ‘비판적인 시절’이 있었던가. 

그게 아니라면 너는 지금, 그 저편에 놓여 있는 평안함과 원숙함을 희망할 때가 아니라 오히려 그 한가운데에서, 무엇으로도 가장하지 않은 정신으로 무장하고, 치열하게 삶을 사유하고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기 전에 너는 결코, 삶에 대해, 그 삶의 굶주림에 대해, 쉽게 공감을 말하진 말아야 할 것이다. 


- 컨텐츠팀 에디터 현선(anejsgkrp@bandinlunis.com)



[서점에서 만난 사람] 세상의 중심에서 변방을 외치다 - 신영복 서점에서 만난 사람

 


 

편집·정리 | 컨텐츠팀 에디터 현선·희진
도서 이미지·사진 제공 | 돌베개

지난달에 신영복 선생님을 만나고 왔던 거, 다들 기억하시죠? (북콘서트 후기 바로가기 클릭!) 당시에는 엄청난 인파 때문에 간단한 인사 한 마디 청하질 못했는데요. 좋은 기회로 선생님과 독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서면이기는 하지만 얼굴을 마주보고 앉았다는 마음으로 질문 보따리를 풀어 놓았습니다. 여러모로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내어 답변을 적어나가셨을 선생님의 신중한 손짓을 상상해 봅니다. 책을 읽은 분들에게는 이 인터뷰가 좋은 부록으로 남고, 읽지 않은 분들에게는 변방을 찾아가는 계기이기를 바랍니다.



반디|‘변방을 찾아서’라는 기획 하에 찾아가신 곳 이외에, 독자들과 함께 그 의미를 공감할 수 있는 글씨들이 많이 남아 있다고 하셨습니다. 언젠가 조용히 찾아가려고 하신다고도 말씀하셨고요. 마음속으로 생각하신 곳 중 하나의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을까요?

신영복 | 마석 모란공원 묘역이 그중의 하나입니다. 박종철 묘비명 그리고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어머님 묘비와 민주주의자 김근태 의장의 묘비가 있습니다. 제가 출소한 며칠 후에 박종철 아버님, 이소선 어머님과 함께 모란공원 묘역을 찾아갔었습니다. 자식의 묘비를 닦는 부모님의 마음이 절절하게 전해왔습니다. 저는 비록 20년 후에 다시 돌아올 수 있었지만 영영 돌아올 수 없는 아들을 묻은 부모님의 마음이 가슴 아팠습니다. 살아서 돌아왔다는 사실이 오히려 죄송했습니다.

반디 | 책의 머리말에 “작은 돌멩이 하나가 완고한 벽을 깨뜨리지는 못한다. 그러나 깜깜한 어둠 속을 달려가 벽에 부딪치는 ‘작은 소리’를 보내옴으로써 보이지 않는 벽의 존재를 알리기에는 결코 부족하지 않다.”라고 쓰신 것이 인상 깊었습니다. 이 책을 읽는 개개인이 “작은 돌멩이”라면, 선생님께서 생각하실 때 요즘 사회상에서 깨뜨려야 할 “완고한 벽”이라면 무엇이 있을까요?

신영복 | 그 벽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열거하는 것은 글의 의미를 왜소화할 위험이 없지 않습니다. 독자들에게 보여주려고 하는 완고한 벽은 우리가 갇혀 있는 완고한 인식 틀이기도 하고 막강한 권력 구조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이성과 감성 자체를 포획하고 있는 정교한 포섭기제이기도 하고, 우리 스스로가 매몰되어 있는 욕망과 환상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둠 속을 달려가서 부딪친다는 표현이 바로 그것의 존재 자체를 우리가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우선은 벽 자체의 존재를 자각하는 일에서부터 시작하여야 하는 것이지요.

반디 | 허균·허난설헌 기념관, 박달재, 이세종 열사 추모비, 김개남 장군 추모비처럼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장소들에 많은 글씨를 남기셨습니다. 대개 요청을 받으신 경우가 많을 것 같은데요. 선생님께서 개인적으로 자진하여 글씨를 헌정하고 싶은 현재의 ‘변방’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신영복 | ‘변방’이란 기존의 특정한 공간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중심부가 있는 한 반드시 변방이 생성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변방은 새롭게 생성되는 역사적 현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도 수많은 변방이 생성되고 있습니다. 그러한 곳이라면 당연히 글씨를 헌정하고 싶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글씨만으로서 변방성을 획득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반디|‘변방의 동학(動學)’과 관련하여 그것이 곧 운동이고 변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한 개인이 지닌 ‘변방 의식’이 타인과 공유되는 과정을 거쳐 그 의식이 다시 행동의 연대로 이어지는 실제적 과정을 내포하고 있다고 보이고요. 하지만 의식을 행동으로 옮기는 게 제일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일생 동안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고 “또 하나의 가장 먼 여행은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이라고도 하셨고요. ‘변방 의식’에 있어서도, 아직 머리와 가슴에만 머물러 있는 이들에게 조언을 한 말씀해주신다면?

신영복 | 변방이 창조공간이 되기 위해서는 중심부에 대한 콤플렉스를 청산해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머리와 가슴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중심부에 대한 콤플렉스를 청산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심부의 강력한 구심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거나 변방에 대한 신뢰가 없는 경우가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중심부의 가치에 매몰되거나 포획되어 있는 생각의 틀을 깨뜨려야 합니다. 그리고 변방의 많은 사람들과 어깨를 짜고 함께 나아갈 때의 든든함에 대한 신뢰를 키워야 합니다.

반디|“어떤 장세(場勢)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는 경우라 하더라도 모름지기 변방 의식을 내면화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라고 말씀하신 부분에서 최근 자주 거론되는 ‘강남좌파’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강남좌파’에 대해 선생님께선 개인적으로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신영복 | 강남좌파라는 표현은 그것의 모순을 지적하는 조어이며 비방의 언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식인은 ‘자기를 추방하는 사람’이며, 지식인은 스스로 ‘계급을 선택하는 계급’이라고 정의하기도 합니다. 역사적으로는 자신의 계급과 처지를 뛰어넘은 사람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사회 변동기나 식민지 해방 투쟁과 같은 경우에는 특히 그렇습니다. 계급과 처지를 뛰어넘는다는 것은 자기 개인의 이해관계를 뛰어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디|책을 통해 꾸준히 많은 독자들과 만나고 계십니다. 앞으로도 《변방을 찾아서》와 같은 책을 또 볼 수 있을까요? 또한 해남 미황사에서 마을 주민과 담소를 나눈 것처럼 다른 식으로 사람들과 만날 생각이 있으신가요? 이와 관련하여 선생님의 향후 계획을 듣고 싶습니다.

신영복 | 현재로서는 집필이나 사람들과의 만남이 계획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형태가 될지 모르지만 그런 계기가 없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말과 글을 통한 만남도 아름다운 동행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동행은 많은 사람들과 애환을 공유하는 것이며 자신을 키워가는 일이기도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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