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로, 그대 숨결을 느끼다 - <A가 X에게> 블로거, 책을 말하다

 존 버거, <A가 X에게>, 열화당, 2009

몸이 조금씩 아파오는 게 느낌이 좋지 않았다. 내가 약국을 다녀올 수도 있었지만, 이미 옷을 갈아입은 뒤라 조카들에게 약 이름을 알려주고 심부름을 보냈다. 집 근처에 약국에 세 군데 있어서 설마 못 사올까 싶어서 안심하고 보냈는데, 휴일이라 그런지 모두 문이 닫혔다며 허탕을 치고 돌아왔다. 근방의 약국들이 한꺼번에 문을 닫으면 다급한 사람은 어쩌라는 건지, 잠시 푸념을 한 뒤 헐레벌떡 뛰어온 조카들에게 수고비 500원을 쥐어 주고(배분은 알아서 하겠지.), 읽다만 책을 펼쳤다.

굳이 안가도 되겠다 싶은 약국을 조카들을 시켜서 가게 한 것은 존 버거의 소설 속 인물  아이다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직접 가지는 않았지만 왠지 그곳에서 아이다의 환영을 보게 될까봐. 조카의 손을 거쳐 내게 도착한 약에서 혹시나 그녀의 손길을 느낄까 그녀를 나의 현실로 끌어 내렸지만, 그런 바람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아 마음이 허전하다. 다른 약국을 간다는 것이 귀찮아서 그냥 잠이 들었는데, 새벽에 진탕 아파 버렸다. 데굴데굴 구르고, 토하고, 식은땀을 흘리고 나니 정신이 몽롱했다. 오전 근무만 하고 집으로 돌아와 내리 몇 시간 동안 잠만 잤는데도 아픔은 가시지 않고, 배는 고프고, 생각은 한정돼 버리는 것에 상실감을 느꼈다.

누워 있으면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기에 책을 꺼내 읽었다. 손에 쥔 책을 다 읽었음에도, 어제 읽은 존 버거의 소설 속의 아이다란 인물이 자꾸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아이다는 결국 무거운 몸을 일으켜 나를 컴퓨터 앞으로 이끌었다.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지금 남기지 않으면 사라져 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를 모르고 지나쳐 버리는 사람들, 그녀가 한 남자에게 쓴 편지들이 묻힌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 견딜 수 없었다.

감옥에 갇힌 남자, 편지하는 여자

아이다는 감옥에 갇힌 한 남자에게 편지를 쓴다. 남자는 반정부 테러 조직을 결성했다는 혐의로 이중종신형(죽을 때까지 감옥에 있고, 죽은 나이만큼의 기간 동안 시신을 감옥 밖으로 내올 수 없다는 형벌.)을 받을 사비에르라는 청년이다. 새 교도소가 들어서면서 73호 감방에서 머물렀던 마지막 수감자. 협소한 수납 칸에서 아이다가 보낸 편지가 발견된다. 이 책에는 부치지 않은 편지도 수록되어 있는데, 그 경위는 밝히지 않고 사비에르가 정리한 순서그대로 실려 있다.

아이다는 비교적 차분한 어투로 사비에르에게 편지를 쓴다. 격정에 휩싸여 쓴 편지는 종종 붙이지 않았지만, 이중종신형을 당한 남자에게 쓴 편지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차분하다. 자신의 일상을 토대로 그와의 추억을 기록해 가는 그녀는 담담해 보인다. 그러나 다양한 언어로 애칭을 바꿔가며 애정을 표시하고, 편지 중간 중간에 등장하는 ‘사랑해요’라는 표현은 읽는 이의 마음을 저릿하게 만든다. 흔히 볼 수 있는 연애편지로 볼 수도 있겠지만, 아이다와 사비에르는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들은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면회도 허락되지 않고, 결국 유일한 교류 수단은 편지 밖에 없다.

돌아올 수 없는 이에게 쓰는 편지란 어떤 기분일까. 오래 전, 군대에 있는 남자친구에게 그리움을 가득 담아 편지를 쓴 기억을 떠올려보면 아이다의 먹먹한 기분이 조금은 전해지는 느낌이다. 그러나 휴가, 면회, 제대라는 기다림이 있었던 반면 아이다는 그 모든 것이 단절된 상태고, 강제로 헤어진 연인에 대한 그리움을 편지로 밖에 전할 길이 없다. 편지 안의 그를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어 내재된 그리움은 보는 이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편지 속의 그리움은 아이다와 사비에르가 처한 현실이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다. 사비에르가 어떠한 연유로 잡혀갔는지 자세하게 나와 있지 않았지만, 혼란스러운 국가, 억압당하고 강제성을 띠는 인권, 불안에 떨며 하루하루를 보내야 하는 두려움은 늘 감지된다. 그녀도 어떤 활동을 하는 것 같았지만, 저자의 설명대로 숨겨진 의미를 찾기란 어렵다. 사비에르를 향한 그리움, 거대한 집단 앞에 힘없이 무너지는 한 인간과 무리들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내겐 숨이 차오를 지경이다. 
 
오랜 기간 사비에르가 받았던 편지 읽기를 멈출 수가 없다. 밤이 깊어갈수록 그녀의 그리움은 배가 되어 내 안에 맴도는,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킬 정도다. 그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잠시 책을 덮고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기도 했지만, 아이다의 상실감에 비할 바 못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천연덕스럽게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을 상세히 기록해가는 아이다, 큰 사건을 일상처럼 말해야 하는 아이다, 처절할 정도로 사랑하는 이의 온기를 느끼고자 자신의 손을 그려 나가는 아이다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그들을 갈라놓은 보이지 않는 힘에 저항심마저 생긴다.

아이다의 편지에 상응하는 사비에르의 편지는 없다. 다만 그녀가 보낸 편지 뒤편에 사비에르의 메모가 있는데, 그의 해설이 필요한, 난해하고 짤막한 글들이 대부분이다. 그 글은 아이다에 대한 글이 아니다. 세계 곳곳에 행해지는 반인간적인 행위에 대한 개탄과 상대성을 그린 것이 많다. 그 낯선 이질감에 몸을 떨면서도 사비에르가 그런 글을 쓸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이라 그랬을까. 감옥 밖으로 한 발짝도 내디딜 수 없는 그는 아이다의 편지의 뒤편에 세상의 곳곳을 누비며 보이지 않는 활동가다운 호소를 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더라도 사비에르가 아이다에게 보낸 편지는 상세히 알 수 없었기에 그런 아이다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난감해지기도 한다.

감추지 않는 마음, 아니 감출 수 없는 마음
 
아이다가 보낸 편지의 무게가 가벼웠더라면, 사비에르의 메모가 아이다를 향한 것이었다면 편지를 읽는 내 마음은 어떻게 변모돼 갔을까. 아마 조금은 특별한 연애편지로 보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사랑이 현재에도 세계 어느 곳에서 지속되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냥 가볍게 읽고 지나칠 수가 없다. 약국에서 일하는 아이다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그대로 전하며, 때로 활동가로 모습을 드러내며, 자신이 알고 있는 다양한 지식들을 진부하게 늘어놓는다. 하지만 사비에르 앞에서만큼은 한 사람의 여자이고 싶은 마음 또한 감추지 않는다.

아이다의 편지를 읽으며 사비에르의 메모가 무심하다 싶다가도 그가 한두 마디씩 흩뿌려 놓은 아이다를 향한 마음을 볼 때면 둘의 단절이 피부에 와 닿아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그들이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도 없는 단절이 왜 그들에게 일어난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내 자신에게 던져 보았지만, 대답이 돌아올 리 만무하다. 세계화를 빌미로 이루어진 폭력과 자본세계의 병폐와 만인에게 가해지는 불편한 진실을 파악할 힘이 내게 남아있을 리도 없다.

연인(戀人)의 단절된 상황으로 나머지 배경을 파악해 나가는 도리밖에 없다. 아이다의 절절한 편지, 사비에르의 개탄과 비난이 섞인 메모들. 문득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이 무척 낯설게 느껴진다. 과연 나는 행복한 것일까, 저들의 모습을 무시해도 괜찮을 것일까란 질문을 끊임없이 하게 된다. 물론 둘의 단절 앞에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아이다가 얼마를 기다려야 사비에르가 돌아올지 알 수 없었고, 사비에르가 과연 감옥에서 나올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다.

마지막 편지 뒷면에 그려진 ‘오늘 밤의 탈출 경로’를 통해 둘의 재회를 잠시나마 꿈꿔본다. 먹먹한 가슴을 주체할 수 없다. 그들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그들의 운명이 어떤 종말을 맞든 그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저자의 말처럼 신께서 그들을 지켜주시기를 바랄 뿐이다. 더 이상 그들이 처한 상황들이 더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도 크지만, 그 바람은 아주 먼 얘기로만 느껴져, 내 존재가 너무나 미미하게 다가와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존 버거는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작가라 그의 신간이 나왔나 정기적으로 검색해 본다. 우연히 신간이 나온 것을 보고 바로 구입했는데, 그의 소설은 처음이거니와 두껍지 않은 책임에도 묵직한 무게감을 지니고 있어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의 산문과 시, 평론을 주로 읽다 소설을 마주하게 되니 다시 한 번 그의 역량에 감탄하면서도, 허공을 향한 흐릿한 시선을 거둘 수 없는 나를 자주 만나게 됐다.

아이다의 편지를 온전히 이해했다고, 사비에르의 메모에 동감한다고 말할 수 없지만 존 버거가 그려낸 세계는 동떨어진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게 됐다. 이 책을 계기로 그의 소설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고, 먹먹한 가슴앓이가 계속 이어지더라도 다른 작품을 탐독해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당분간은 아이다란 인물이 내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을 것 같다. 좀 더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인물을 갈망하며 그의 새로운 작품을 향해 손을 내밀어 보련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태극취호’님은?
도능독(徒能讀)을 일삼는 자. 책 읽기도 습관이라 생각하며, 책이라면 환장하며 달려드는 서른을 눈앞에 둔 철딱서니. 언제나 머릿속에 사방이 책으로 둘러싸인 방에서 살아볼까 꿈만 꾸는 몽상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