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드 부크홀츠, <카스트로 유전자>, 리버스맵, 2009
사무실 서가 앞에서 어슬렁대고 있는데 <카스트로 유전자>란 소설이 눈에 띄었다. 정장을 입었으나 야수성이 살아있는 남자가 권투를 하는 표지. 하지만 그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토드 부크홀츠’란 저자의 이름이다. 누구더라. 곧, 경제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할 무렵 읽었던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가 생각났다. 무척 즐겁게 읽었었다. 근데 이 사람 책이 소설을 썼다고? 농구 황제 마이클 조단이 야구 선수로 변신해 세간의 비웃음을 샀던 기억이 떠올랐다. 업종 변경이 얼마나 힘든 일인데. ‘일단 집에 가는 동안에만 읽어보자’는 마음을 먹고, 전철에 올랐다.
책장을 넘기자, 숨 막히는 권투 경기가 펼쳐진다. 젊은 복서 루크 브레이든은 열기 가득한 사각의 링에서 관록 있는 쿠바 복서 페레즈와 한 판 승부를 벌이고 있다. 루크는 자신의 체력은 바닥이 났지만 상대는 죽음의 문턱에 다다른 것도 알고 있다. 페레즈는 항복하려는 몸짓을 하지만, 코너에서는 고깃덩이가 된 인간을 링 중앙으로 내민다. 이를 목격한 루크는 더 이상의 공격 의지를 상실한다. 하지만 경고로 점수가 깎이고, 페레즈는 달려들고, 성난 관중들이 “브레이든, 노 코호네스(불알 없는 놈)!”을 외치자 루크는 상대의 턱에 주먹을 날린다. 상황 종료. 페레즈는 쓰러지고, 루크는 승자이자 살인자가 된다.
영문학과 교수인 아버지처럼 고상하지도, 그렇다고 충분히 거칠지도 못한 루크는 경기 이후 죄책감에 사로잡혀 6개월 간 두문불출한다. 하지만 링 위에 서지 않는 이상 백수인 그는 생활고에 시달려 월가의 한 투자은행 경비로 취직한다. 날렵한 정장을 빼입고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직원들을 부러운 바라보는 루크. 이후 사장의 눈에 띄기 위해 작업을 펼치던 어느 날 사장에게 호출을 받고 깜짝 놀랄 소식을 듣는다. 금융계의 거물인 폴 트레먼트가 자신을 고용해, 상상 이상의 돈을 만진다는 것이다. 이제 루크는 폴의 시험을 치르며 세계 경제의 중심부, 그리고 거대한 음모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카스트로 유전자>는 속도감 있는 전개로 보는 이를 사로잡는다. (야구 열기가 한창이라 야구 소설 <내추럴>을 읽으려고 했는데, 이 책을 손에 잡고 <내추럴>은 잠시 미루게 됐다. 그런데 이 책 속에 <내추럴>에 대한 언급이 나와 깜짝 놀람.) 성공 뒤에 도사리고 있는 거대한 음모, 서서히 밝혀지는 출생의 비밀, 상원의원과 FBI가 얽힌 추격전, 상원의원의 딸 코리와의 사랑 등 잘빠진 할리우드 스릴러 영화를 보는 느낌이다. 이쯤 되면, 저자의 업종변경에 대해 걱정은 기우였음이 곧 밝혀진다.
자본주의 불길에 휩싸인 부나방 혹은 개구리
토드 부크홀츠는 이 소설에서 경제학자로서 자신의 장기를 십분 활용한다. 그는 세계 자본의 흐름을 소설 전반에 배치함으로써 금융 중심의 자본주의 사회가 얼마나 소름끼치는 것인지 보여준다. 하룻밤 사이 천문학적인 돈이 오고가고, 수많은 기업이 파산하기도 한다. 그런데 자본력을 이용해 금융의 흐름을 바꾸고, 막대한 이익을 챙기는 사람을 우리는 ‘나쁜 놈’이라 할 수 있을까? 폴 트레먼트는 ‘돈 놓고, 돈 먹기’에서 번 돈으로 생명을 구하고, 희망을 전달하는 수많은 자선 사업을 한다. 또 주식시장에 뛰어드는 사람들 모두 일확천금을 바라고 뛰어든 부나방이 아닌가. 자본에는 인격이 없다.
“월스트리트는 날씨와 같다네. 자연현상과 같아. 허리케인이 상륙하면 플로리다의 이동주택 주차구역에 사는 주민들 200명은 트레일러에 덧댄 파형 강판이 바람에 쓸려 에버글레이즈까지 날아가는 걸 지켜본다네. 그렇다고 기상예보관이 수치심을 느낄까? 멕시코시티에 지진이 발생했을 때 어린이 5천명이 함몰됐는데, 어느 누가 수치심을 느끼던가? 안 됐다는 생각은 할 테지. 하지만 죄책감을 느낄까? 대체 자네가 뭐지? 신이라도 되나? 그런 수치심은 신이나 느끼라고 하게.”(p. 176, 폴 트레먼트가 루크에게 하는 말.)
금융시장은 루크가 피 튀기며 싸웠던 권투 시합장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권투 시합은 사람이 사람을 잘 때릴수록 칭송을 받는 게임이고, 월스트리트는 온갖 작전과 술수로 높은 수익률을 기록할수록 인정받는 게임이다. 권투에서 승자가 챔피언이 되듯, 높은 수익률을 기록한 사람은 승진으로, 고액의 보너스로 보상을 받는다. 여기에 쓰러진 자, 주식으로 돈을 날린 사람들에 대한 관심은 없다. 그들은 ‘루저’(패배자)일 뿐이며, 냉혹한 세상은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줄 만큼 관대하지도, 한가하지도 않다.
또 한 가지 소름 끼치는 것은 루크가 폴 트레먼트의 세계에 편입되는 과정이다. 루크는 처음 자신의 인터뷰로 많은 기업이 손해를 본 것을 보고, 환멸을 느낀다. 하지만 앞에 언급된 폴 트레먼트의 충고(?)를 듣고는 ‘내가 신경 쓸 바 아니’라며 자기 합리화를 시도한다. 또 시험의 난이도가 높아질수록 그가 사용하는 편법의 수위가 높아진다. ‘이곳이 내 길이 아니면 언제든지 떠나겠어’라고 마음을 먹었던 루크는 고가의 펜디 구두에, 초호화 오피스텔에 익숙해지면서 충분히 변한다. 그리고 자신의 트레이너이자, 진실한 친구였던 벅의 말을 의심하는 순간, 그는 더 이상 운동화를 신을 수 있는 루크가 아니다.
<카스트로 유전자>는 우리가 깨어있다는, 세상을 직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얼마나 순진한 생각인지 알려준다. 또 냄비 안의 개구리처럼 자본주의의 열기에 휩싸여 자신을 잃어가는 인간의 모습 또한 보여준다. 개구리의 끝이 죽음이었다면, 자본주의적 인간의 끝은 무엇일까. 혹 그 거대한 변화 앞에 우리는 무방비 상태로 노출돼 있는 것은 아닐까. 책을 덮는 순간 루크의 이야기는 끝나지만, 우리의 시험은 끝나지 않는다. 반디(ak20@bandinlunis.com)




덧글
명상 2009/10/05 12:21 # 답글
프스트만 봐도 흥분될만큼 재밌어보이네요.자본주의의 폭력에 비하면, 실제 인간들이 치고 받는 폭력이
차라리 인간적이다... 라는 이야기로 생각되네요.
관심있는 분야라서 꼭한번 읽어봐야겠네요.
좋은책 추천 감사합니다~
반디앤루니스 2009/10/06 09:53 #
명상님 말씀하신대로 자본주의가 정말 무섭습니다..아무리 험한 짓(?)을 해도 결과로 용서를 받는..
관심있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