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개의 황금손가락 - 재즈 피아노의 향연! 책갈피, 세상의 속살

 

공연은 이미 시작됐는데, 집중하기가 쉽지 않다. 머릿속에는 3:0, 5:5 등 숫자들이 동동 떠다닌다. 집에서 나올 땐 SK 와이번스가 3:0으로 앞서 있었는데, 공연장에 들어오기 전 옆 사람 dmb를 슬쩍 보니 기아 타이거즈가 5:5로 균형을 맞추었다. 이건 말 그대로 대박이다. 한국시리즈 7차전에 이런 박빙의 승부가 펼쳐지다니! 더구나 지금까지의 모든 경기가 아름답지 않았던가! 

이러면 안 된다. 이 공연이 어떤 공연인데. 내로라하는 국내 재즈 피아니스트 10명이 펼치는 ‘백 개의 황금손가락’이다. 언제 이 라인업을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른다. 집중하자! 아, 집중하자고 하니 더 집중이 안 된다. 에이, 모르겠다. 생각나는 대로 생각하고, 들리는 대로 듣자. 어차피 후회는 한 번이면 족할 테니. 허대욱, 이지영, 고희안의 연주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참 대단하다. 어떻게 저렇게들 피아노를 잘 치지. 아무렇지 않게 치는 거 같은데, 음악이 된다. 난 아무렇지 않게 하면서도 잘하고 있는 게 뭘까. 

익숙함이란 무서운 거다. 확실히 배장은, 송영주 등 음반이 갖고 있는 연주자들이 나오니까 집중이 더 잘 된다. 신기하기도 하다. CDP에 재생 버튼을 누르는 순간에는 지금의 이 자리를 상상하지 못했다. 그들은 이번 공연의 컨셉인 ‘빌 에반스’의 곡과 자신의 곡을 연주한다. 솔직히 그 연주가 왜 좋은지 말로 설명하기는 (나는) 어렵다. 하지만 그들이 만들어내는 풍부한 피아노 소리는 좋고, 그 엄청난 손놀림이 놀랍다. 또 배장은과 송영주는 팬서비스 차원(?)에서 마이크로 입을 강타하는 몸개그도 선보인다. 즐겁다.

5명의 연주자의 공연이 끝나고 쉬는 시간에 밖에 나와 돼지바를 먹었다. 그리고 2부 공연이 끝나면 꽤 늦어질 거란 생각도 한다. 잠시 생각 밖에 머물던 야구가 또 들어왔다. ‘오십 개의 황금손가락만 보고 갈까?’ 했지만, 이내 마음을 접었다. 2부에 어떤 공연이 펼쳐질지 모른다. 이런저런 상상에 기대감이 커지면서 2부 공연을 보러 들어갔다. 동행이 앞에서 보고 싶다기에 자리를 앞으로 슬쩍 옮겼다. 

같이, 따로, 또 같이

가까이서 봐서 그런지, 연주자의 손놀림이 더 잘 보인다. 그리고! 피아노와 베이스, 드럼이  호흡을 맞추는 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송준서는 다른 연주자들과 눈을 맞추며, 다른 악기들이 전면에 나설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오, 내가 좋아하는 호흡! 이는 원영조도 마찬가지. 도인까지는 아니지만, 뭔가 초탈한 느낌을 풍기는 원영조는 느리게, 또 빠르게 자유로움을 연주했다. 그리고 그는 들어가면서 한 마디 했다. ‘이제 재즈 피아노계의 원더걸스라 불리는 연주자가 나옵니다.’ 원더걸스! 잔뜩 기대했다. 그런데, 남자다.

다행히 실망감은 매우 짧았다. 민경인의 연주는 뭐랄까, 천재의 냄새를 풍겼다. 풍부한 감성도, 화려한 테크닉도 모두 갖춘 것 같다. 난 그것으로 만족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집에서 ‘인기가요’를 보고 있을 테지. 이후 임미정이 나왔다. 예전에 베니 골슨 할배가 한국에 왔을 때 EBS 스페이스 공감 공연에서 피아노를 쳤던 연주자다. 베니 골슨이 미국에 데려가고 싶을 정도로 탐냈던 그녀의 연주는 여전히 좋았다. 드디어 마지막 열 개의 손가락을 채울 연주자 전혜림이 나온다. 개개인의 연주에 대해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전혜림의 연주에 관객들이 가장 큰 환호를 보냈다. 마지막이라 그랬나?

전혜림의 연주가 끝나고 백 개의 황금손가락이 한 자리에 모였다. 공연 전 샌드위치로 끼니를 때운 게 고작인데,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배가 불렀다. 그리고 펼쳐지는 「Autumn Leaves」. 베이스가 ‘둥 두둥 둥두~ ‘둥 두둥 둥두~’를 반복하자 두 명의 연주자가 마주본 두 대의 피아노에 앉아 연주를 하기 시작한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이란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오르는데, 더 멋지다. 그렇게 10명이 돌아가면서 연주를 하는데, 기억으로는 20분도 넘게 펼쳐졌던 것 같다. 한 곡을 백 개의 손가락이 연주하는, 아주 근사한 연주였다. 잘 왔다!

백 개의 황금손가락

세 시간이 넘는 공연을 보면서 머릿속에서 시나리오가 하나 떠올랐다. 처음엔 장난처럼 ‘99개의 손가락은 어떨까’ 생각했다. 연주자 한 명이 사고로 손가락을 잃은 뒤, 좌절하다 그걸 극복하고 음악으로 승화하는 빤한 스토리다. 그런데 공연을 보면 볼수록 이게 장난이 아닌게 느껴졌다. 그동안 뭔가를 보고 쓰는 거에만 익숙했었지, 뭔가를 만들어내고 싶은 욕심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꼭 써보고 싶다. 음악이 잘 받쳐준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 또 관객을 압도할 절정의 장면도 떠올랐다. 만약 이게 영화화된다면, 이 공연은 내게 영감(!)을 준 공연이 될 테다. 영화 제목은 <백 개의 황금 손가락>이다. COMING LA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