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언제 감동을 느낍니까? 민용 in 재즈피플

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사진 이루카) 

10월 16일부터 18일까지 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에 다녀온 후, 일주일이 넘게 바쁜 하루하루를 보냈다. 감동을 채 되새겨보기도 전에 그때의 일들을 쏟아내야 했고, 그건 멀미가 날 정도로 많은 텍스트들을 쓰고 읽었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 사이 공연 하나를 관람했다. ‘전무후무(前無後無)한, 다시 볼 수 없는 공연’이라는 과장된 부제를 달아도 좋을 만큼 국내 재즈계에서는 의미 있는 공연이었다. 마감이 막바지에 다다를 즈음에는 아무리 유명한 연주자가 내한해도 공연장에 가기가 쉽지 않은데, 이 공연은 앞으로 몇 년을 우려먹어야(?) 할지 모르는 만큼 꼭 가야했다.  

자라섬 밤하늘에서 펼쳐진 불꽃놀이(사진 이루카)

X축과 Y축 어딘가에 놓인 감동의 Z점 

고개를 들어 천장을 봤다. 무대 위에서는 스타인웨이가 제 몸을 때려가며 아름다운 선율을 빚어내고 있었지만 이내 혼란스러운 마음이 되어 귓가에 내려앉았다. 공연장에서 조는 일은 거의 없지만 연주가 귀에 들어오지 않을 때는 눈을 감는다. 혹은 천장을 본다. 공연을 보는 일이 많아질수록 눈을 감거나 천장을 보는 일이 많아진다. 음악을 듣는다는 것도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것과 유사하다.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할 수는 없지만 연주 실력, 이력, 컨셉트, 사운드 등을 적당히 X축과 Y축의 좌표로 그려놓고 어딘가에 존재하는 Z점을 찾아내는 것이다.

음악을 처음 들을 때는 Z점이 좌표를 장악할 만큼 크고 진하다. 하지만 음악을 많이 들을수록 Z점은 세밀해진다. 그건 감동의 크기와도 비례한다. Z점이 클 때는 직관으로 받아들이는 음악 자체가 감동이다. 하지만 Z점이 세밀해질 경우 이미 알고 있던 음악들에 방해를 받아 감동은 줄어든다. 저번 앨범이 더 나은 것 같은데, 함께 한 연주자들이 조금 아쉬운데…. 사실 재즈는 많이 알수록 많이 들리는 음악이고 앎이 커질수록 감동의 진폭도 크다. 물론 초보자들이 느끼는 감동과는 다른 감동이다. 하지만 재즈 초보자가 느끼는 직관적인 감동은 그 당시에만 느낄 수 있다. 언제나 초보처럼 듣는다는 건 재즈를 많이 듣지 않아도 (적어도 나에겐) 쉽지 않은 일이다.  

얀 룬드그렌 트리오(사진 이루카)

 음악보다는 사람 구경

글머리에서 이야기했듯 얼마 전 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에 다녀왔다. 이제 자라섬은 재즈를 잘 모르는 이들과 가도 부끄럽지 않을(혹은 제법 자랑스러울) 정도로 모양새를 갖춘 페스티벌이 되었다. 행사 진행이나 라인업은 예년부터 탄탄한 편이었지만 자라섬의 외관도 많이 다듬어져 있었다. 첫 해에 먼지 풀풀 날리던 길도 단단하게 다져지거나 보도블록이 깔렸고, 비가 오면 신발을 못 쓰게 만들 정도로 질척했던 땅에도 잔디가 푸릇하게 솟아 있었다. 

페스티벌이 시작되는 16일, 기상청은 전국적으로 비가 내릴 것이라고 예보했고 자라섬으로 가는 길에도 찌뿌듯한 날씨가 계속되었다. 자라섬에 도착해 일행을 만난 시간은 오후 다섯 시가 넘어서였다. 일행과 어색한 인사를 나누며, 1년 만에 몰라보게 달라진 자라섬을 구경하며, 공연장까지 거리가 너무 길다고 투덜대며 재즈 아일랜드로 들어섰을 때는 이미 얀 룬드그렌 트리오의 공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얀 룬드그렌은 국내 인지도가 그리 높은 편은 아니지만 ACT(독일의 유명한 재즈 레이블)에서 앨범을 발표하며 꾸준히 소개되고 있는 피아니스트다. 게다가 영국 영화배우처럼 근사하게 생겼다.  

팻 마티노 퀄텟(사진 이루카) 

개막식과 함께 그다지 유쾌한 인사말을 건네지 못하는 높은 분들(?)의 센스를 날려버리는(!) 불꽃이 터졌다. 감동이라는 맥락에서 불꽃놀이는 말로 설명하거나 평가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닌 그 자체의 아름다움과 주변 환경에 영향을 받는 것이기 때문일까. 언제 봐도 아름답다. 이어지는 공연은 기타리스트 팻 마티노 퀄텟과 트럼페터 엔리코 라바 뉴 퀸텟이었다. 국내에 첫 내한인 두 노장의 공연은 재즈팬들이 가장 기다렸을만한 무대. 팻 마티노나 엔리코 라바 모두 무대 중앙에서 서기보다는 한발 물러서서 다른 연주자의 모습을 지켜보는 편이었다. 하얗게 센 머리와 홀쭉해진 뺨에서 나이가 느껴져 마음이 아프기도 했지만, 그 선율은 단순하면서도 마음을 휘감는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었다. 

팻 마티노의 영롱한 기타 연주와 잘 어우러진 오르간 사운드의 몽환적인 느낌이나 비너스 레이블에서 ‘젠틀 발라드’로 인기를 얻고 있는 에릭 알렉산더의 풍부한 테너 색소폰 톤도 좋았다. 엔리코 라바는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연주자여서 기대를 많이 한 공연이었다. 함께 내한하는 연주자들이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소위 B급 연주자라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엔리코 라바는 오래 전부터 후진 양성 또는 신인 발굴에 힘써왔던 연주자라 그가 선택한 연주자라면 믿을 만 했다. 게다가 B급 세션(이라기보다는 신인 연주자들이라는 표현이 더 맞지만)이 이 정도라면 이탈리아 재즈계는 도대체 어느 정도란 말인가! 더욱이 최근 같이 활동하고 있는 트롬보니스트 지안루카 페트렐라는 사진으로 보아도 상당히 젊은 연주자인데 매우 강하고 인상적인 연주를 선보이고 있었다. 

엔리코 라바 뉴 퀸텟(사진 이루카)

설명할 수 없는 감동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앞서 이야기했던 Z점을 찾는다. 연주가 어떠했는지 그때의 느낌은 어땠는지를 기억하기보다는, 무대 위나 객석에서 벌어졌던 ‘상황’들을 더 기억한다. 객관적인 듯한 주관적인 기억으로. 누군가에게 글로 설명하기에는 단지 ‘좋았다’라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리고 어떻게 어떤 점이 좋았는지를 설명하다보면 늘 감정이란 게 저 뒤로 밀리게 된다. 앞서 보았던 공연이나 자라섬에서 다소 서글프게 느껴졌던 건 바로 그것이었다. 타인의 감동을 읽어내야 했다는 것. 이 부분에서는 사람들이 좋아하겠구나, 저런 부분에서는 사람들이 아쉬워하겠구나 하는 것들을 생각하며 타인의 감동을 읽는다.  

페스티벌의 둘째 날인 17일에는 자라섬에 약 7만5천명의 관객이 모였다. 당연히 내가 본 것은 ‘사람들’이었다. 무척 좋아하는 스타일인 야론 허만 트리오의 공연도, 가슴 벅찬 감동이 느껴졌을 아비샤이 코헨 오로라의 공연도, 한 귀로 듣고 두 눈으로 사람들을 쫓고 있었다. 치킨을 먹고 와인을 마시는 사람들, 치코 앤 더 집시스의 노래에 춤을 추는 사람들, 그리고 감동에 차 공연을 보는 사람들까지. 그리고 사람들이 그곳에서 느꼈을만한 감동을 적어내려 갔다. 하지만 정작 내 기억에 남는 것은 연주와 연주자의 좌표 안에 있는 음악이 아니라, <오즈의 마법사>의 소용돌이 속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느껴졌던 새벽의 폭우와 야구 중계를 보는 듯 마는 듯 잠이 들었던 휴일 오후였다. 그 이유는 설명할 수 없지만 그냥 좋았다. 여러분은 언제, 어디에서 감동을 느끼는가? 나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에서 감동을 느낀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감동은 설명하기 어렵다. 

엔리코 라바 뉴 퀸텟(사진 이루카) 

(블로그의 성격과는 맞지 않을) 비하인드 스토리가 되어버렸지만, 이 글이 자라섬에서 받았던 감동을 제대로 전해주지 못하는 것은 감동 받은 부분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년에는 모두들 자라섬에서 ‘설명할 수 없는 감동’을 느껴보시기를 바랄 뿐. 그리고 그 감동은 설명되지 않아도 좋을 듯하다. 그냥 ‘좋았다’면 좋다. <재즈피플> 안민용 기자 [재즈피플 보러가기(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