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을 속삭여 줄게> - 언젠가 떠날 너에게 책, check, 책

정혜윤, <런던을 속삭여 줄게>, 푸른숲, 2009

속삭임은 로맨틱하다. 새 생명이 숨 쉬는 배를 안고 하는 속삭임, 아이의 머리맡에서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속삭임, 마주 안은 가슴보다 더 뜨거운 연인의 속삭임, 늦은 밤 전화기를 들고 비몽사몽간에 읊조리는 속삭임 등. 속삭이는 이, 귀가 뜨거워지는 이는 물론이고, 상상하는 이 모두 온몸이 떨린다. 그 찰나의 기쁨 만끽하지 못한 이 어디 있으랴. 다만 그 순간이 기억 속 저 먼 곳에 있다면, 소개해주고 싶은 이가 있다. CBS 라디오 ‘신지혜의 영화음악’ ‘송정훈의 올댓재즈’의 프로듀서이자, <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의 저자 정혜윤이다.

정혜윤은 ‘런던을 속삭여 줄게’라고 말한다. ‘언젠가 떠날 너에게’란 수신인이 있지만, 언젠가 떠나지 않아도 상관없다. 책을, 여행을, 그리고 이야기를 사랑하는 이라면 누구든 좋다. 그녀에겐 꿈이 하나 있다. 어릴 적 <천일야화>를 읽고 얼굴이 묘하게 달아올랐던 소녀는 이제 “모든 사람들을 위한 여행 가이드를 쓰는 일”을 꿈꾼다. 어린 시절 그녀의 밤을 붙잡았던 <천일야화>처럼, 속삭이듯이. 그녀가 처음 선택한 곳은 <해리 포터>의 여행이 시작된 곳 런던. 환상의 공간으로 가는 입구 런던에서 그녀는 마법의 주문을 외우듯 속삭인다.

재미있는 건 속삭임의 목소리가 수시로 변한다는 것이다. 영국 최초의 국립공원 피크 디스트릭트를 거닐던 정혜윤은 <제인 에어>의 샬롯 브론테가 되어 “저 강철색의 하늘, 서리로 덮인 이 세상의 고요와 황량함이 좋소, 손필드가 맘에 드오. 그 고색창연함, 세상에서 뚝 떨어져 있는 외짐, 까마귀가 보금자리 짓는 고목과 산사나무, 집의 회색 정면 (…) 운명의 여신은 저기 너도밤나무 곁에 서 있었소.”(52쪽)라고 말한다. 또 대영 박물관에서는 <영국 기행>의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되어 “런던은 지저분한 도시지만 그 한가운데 자리 잡은 박물관에다 대리석으로 표현된 신들의 시간을 보관하고 있다”(130쪽)고 한다.

정혜윤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문학, 역사 속 수많은 이들이 그녀에게 속삭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압권은 책의 첫 장이자, 시인 바이런, 워즈워스, 소설가 브론테 자매, 제인 오스틴, 찰스 디킨즈 등이 영면을 취하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이다. 여행은 오래 전 그들이 남긴 시와 소설로 되살아나고, 어느덧 시간의 강을 뛰어 넘는다. 그녀는 오늘을 걷지만, 과거의 목소리들은 그녀를 쫓고 그녀의 발걸음에서 생명을 얻는 목소리들은 오늘의 감동으로 되살아난다. 그 감동을 그녀는 ‘사랑’이라 한다.

죽은 자와 산 자가 서로 끈으로 연결되고, 산 자는 죽은 자의 좋은 모습을 모방하여 도시의 모습 자체를 바꾸는 곳! 이것이 많은 무덤들이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최대치의 선량한 기능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떤 도시에도 완벽한 행복은 없기 때문에, 우리들이 늘 삶에 감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우리를 내려다보는 사원의 첨탑이 필요한건지도 모르겠다. 이곳에서 우리는 신에게서뿐만 아니라 죽은 자들에게서도 사랑받고 있다. (62쪽, ‘Westminster Abbey’)

시간이 허락하는 한, 여행은 멈추지 않는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시작한 여행은 세인트 폴 대성당, 대영 박물관, 트라팔가르 광장, 자연사 박물관,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 런던탑을 거쳐 그리니치 천문대에서 마무리 된다. 우리는 뉴턴, 제인 오스틴, 넬슨, 빌헬름 텔, 셰익스피어 등의 삶을 통해 가장 뜨겁고, 찬란하며, 비극적이면서도 로맨틱한 도시 런던을 만난다. 이 과정에서 정혜윤에게 속삭인 책은 100권이 넘는다. 그녀의 발걸음은 그리니치 천문대에서 멈추고, 책은 300쪽에서 끝나지만 속삭임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이 여정이 지금, 런던에 한정된 것이 아니고 그녀의 동행이 영원히 존재할 것이기에, 신이 우리에게 시간을 허락하는 한 여행은 멈추지 않는다.

그녀와 함께 런던 여행(을 가장한 환상, 이야기 여행)을 마치고 도서관을 나올 무렵, 날은 어두워져 있었다. 도서관의 문을 여는 순간 찬바람이 불어 가을이 꽤나 깊어졌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멀리 도도하게 빛나고 있는 별을 보며 ‘혹시 그녀가 런던에서 본 별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문득 책을 보다가 한참 동안 상념에 잠긴 구절이 떠오른다.

1822년 7월, 타고 있던 요트가 뒤집히는 바람에 익사하고 만다. 그때 시신을 수습하러 간 두 사람 중 하나가 바이런이었다. 셸리의 마지막 모습은 큰 키에 마른 체격, 구부러진 등, 겉저고리의 한쪽 주머니에는 소포클레스의 책, 그리고 다른 쪽엔 키츠의 시집…… 마치 책을 읽다가 황급히 구겨 넣은 듯한 모습이었다고 한다.(44쪽, ‘Westminster Abbey’)

먼 훗날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마지막 순간을 맞는다고 했을 때, 누군가가 영혼이 떠나버린 싸늘한 주검을 발견했을 때 나는 어떤 모습이며, 오른쪽 주머니에는 뭐가 있을까. 휴대폰, 카드 영수증, 약 봉지가 나오면 조금 슬플 거 같다. 부디 근사한 시와 사랑하는 이에게 보내는 편지 하나 있기를…. 반디(ak20@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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