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놀지는 못하리라> - 신명나는 삶의 주인이 되리라 책, check, 책

유승훈, <아니 놀지는 못하리라 - 우리 놀이의 문화사>, 월간미술, 2009

지금, 놀고 싶으십니까? 

예상컨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누구나 쉽게 그리고 비슷하게 할 것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최소한의 삶(의식주)이 보장되는 한에서 최대한 많이 놀고 싶어 할 테니까요. 특히, 최소한의 삶을 위해 버거운 노동을 지속해야 하는 사람일수록 놀이는 더욱 간절해집니다. 그들에게 노동은 자기를 실현하는 과정이기보다는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고달픈 것이기 때문이죠.

이때, 노는 것(놀이)은 일하는 것(노동)의 반대가 됩니다. 그러므로 일하지 않는 사람들은 곧 노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실업자, 백수들은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노는 사람’으로 통용됩니다. 그러니 현재 우리는, 일하지 않고 놀고 싶어 하는 동시에 놀지 않고 일하고 싶어 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현대인들은 확고한 경계들 사이에서 ‘노동’ 아니면 ‘놀이’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받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로 인해 노동을 하는 사람에게는 놀이의 욕구가, 노는 사람에게는 노동의 필요가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어느 것 하나 온전히 즐길 수 없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아니 놀지는 못하리라

책 속에 나타난 과거 조상들의 놀이는 노동과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습니다. 이는 자연 속에서 그 순리대로 살아가던 농업 중심의 생활 방식을 보여줍니다. 특히, 겨울-봄-여름-가을의 계절 순환 구조에 따라 우리의 전통 놀이들을 배치한 책의 구성은 자연과 인간의 상호 관계 속에서 계절의 변화와 깊이 맞물려 있는 세시 풍속의 특징을 효과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책이 겨울의 놀이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농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농번기를 비껴 놀이 문화가 생성된 자연스러운 현상을 그대로 담은 것입니다. 이처럼 과거 조상들의 삶은 자연의 흐름 속에서 그것과 분리되지 않은 채 이어져 나갔으며, 계절의 변화에 따른 노동은 절기 마다 이루어지는 놀이와 맞물려 ‘신명’나는 삶의 일부가 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봄이 오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농사를 준비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해주는 입춘 놀이 풍속은 흙으로 만든 소(토우)를 세워두고 한기(동장군)를 쫓는 용도로 사용됩니다. 이는 12월은 달의 간지로 소(丑)에 해당되며, “끌기도 하고 멈추게 할 수” 있는 소의 견인성(牽引性)을 활용"하여, 한기를 몰아내고 새로운 생명이 움트는 봄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토우를 만들어 세울 뿐만 아니라 때리는 풍습인 타춘(打春)은 입춘 하루 전날 관아 앞에 토우를 세워 두고 고을의 수령이 제사를 지낸 다음, 버드나무 가지로 이 토우를 때리는 것입니다. 이는 봄을 빨리 오게 하라는 재촉의 신호로 타춘을 통해 부서진 토우의 조각은 다시 흙으로 돌아가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모태가 되는 자연 순화의 원리"를 보여줍니다. (104-107쪽)

아니 놀지는 않으십니까?

그런데 “입춘에 대한 애틋한 기다림은 점차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농사가 홀대받는 후기 산업 사회에서 입춘의 반가움을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사시사철 레고 같은 건물 안에 갇혀 일을 하는데 입춘이 언제 오는지 알기는 할까요? 현대사회에서 노동과 놀이(혹은 여가)의 분리는 자본주의와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놀이 문화에서 문화는 결국 산업의 일부로서 자본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또 놀이문화의 주체가 개인이나 공동체가 아닌 소수의 생산자로 이행되면서 놀이의 방법 중 하나인 문화산업은 또 다른 이윤창출의 도구가 됩니다. 

이는 이미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판에 들어가 문화를 소비함을 의미합니다. 게다가 현재 삶의 기반이 개인 중심으로 되어 있는 만큼 놀이 문화 또한 혼자 혹은 소수 집단으로 축소되어가고 있으며, 이러한 맥락에서 몇 해 전에 유행했던 “혼자 놀기의 진수”라는 말은 마을과 같은 삶의 공동체를 상실한 개인들의 씁쓸한 현재 모습을 드러내는 유머라고도 볼 수 있겠죠.

다시 한 판 놀아 볼까요? 
 

그러나 이 말은 또 다른 의미로도 읽힐 수 있습니다. “혼자 놀기의 진수”를 체득한 개인들은 그만큼 능동적으로 자신이 즐길 수 있는 놀이문화를 창조하는 것이기도 하니까요. 그리고 이러한 생산물은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공간을 통해 보다 쉽게 많은 사람들과 공유되기도 합니다. 분명 예전과는 다른 세상이 도래한 것이죠. 그러므로 우리의 놀이 문화가 달라지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러나 ‘우리 놀이의 문화사’를 시작하는 저자의 말은 변화한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노동과 놀이 모두를 더욱 신명나게 할 만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놀이는 경계의 문화라는 것. 죽음에서 삶으로, 고통에서 희망으로, 노동에서 여가로, 그 경계에 서 있는 것이 놀이였다. 만가를 통해 죽음을 승화되고 달구질은 힘든 노역이 아닌 즐거운 노동이 되는 것처럼 전혀 달라 보이는 양자는 놀이를 통해 굳게 결합되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비로소 놀이를 통해 삶과 죽음, 일과 여가, 의례와 놀이가 별개가 아닌 ‘하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하나는 바로 ‘신명’이었다. 신명을 알아차리는 순간, 가슴에 묻혀 있던 죽음의 공포가 허물어졌다.”

이처럼 놀이의 방식이 무엇이든, 경계에 서 있는 문화로서의 놀이는 신명나는 삶의 자리로 삶의 주인인 우리를 초대합니다.  

                                                                                                                            - 현선(anejsgkrp@bandinlun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