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맘대로] ‘시’에게 말 걸기 - 나희덕의 「나 서른이 되면」 詩로 물드는 오후

김종길 외, <설운 서른>, 버티고, 2008 
 

나 서른이 되면

나희덕

 

어둠과 취기에 감았던 눈을
밝아오는 빛 속에 떠야 한다는 것이,
그 눈으로
삶의 새로운 얼굴을 바라본다는 것이,
그 입술로
눈물 젖은 희망을 말해야 한다는 것이
나는 두렵다.
어제 너를 내리쳤던 그 손으로
오늘 네 뺨을 어루만지러 달려가야 한다는 것이,
결국 치욕과 사랑은 하나라는 걸
인정해야 하는 것이 두렵기만 하다.
가을비에 낙엽은 길을 재촉해 떠나가지만
그 둔덕, 낙엽 사이로
쑥풀이 한갓 희망처럼 물오르고 있는 걸
하나의 가슴으로
맞고 보내는 아침이 이렇게 눈물겨웁다.
잘 길들여진 발과
어디로 떠나갈지 모르는 발을 함께 달고서
그렇게라도 걷고 걸어서
나 서른이 되면
그것들의 하나됨을 이해하게 될까
두려움에 대하여 통증에 대하여
그러나 사랑에 대하여
무어라 한마디 말할 수 있게 될까.
생존을 위해 주검을 끌고가는 개미들처럼
그 주검으로
어린것들의 살이 오른다는 걸
나 감사하게 될까, 서른이 되면.

 

단 하나, 세상이 우리 모두에게 공평한 게 있다. 어쩔 수 없이 눈 뜨고 보내야 하는 한나절이 누구에게나 똑같이 찾아온다는 것. 우리는 “밝아오는 빛 속에” 전시(展示)된 세상의 몰골을 여지없이 보아 넘겨야만 한다. 죄 많은 이들의 생(生)이 바로 그 세상에 걸려 있기 때문에. 그래서 시인 허연은 그 세상을 “슬픈 빙하시대”라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도 그처럼 이제 “혼자 술을 먹는 사람들을 이해할 나이가 됐다. 그들의 식도를 타고 내려갈 비굴함과 설움이, 유행가 한 자락이 우주에서도 다 통할 것 같아 보인다. 만인의 평등과 만인의 행복이 베란다 홈통에서 쏟아지는 물소리만큼이나 출처불명이라는 것까지 안다. 내 나이에 이젠 모든 죄가 다 어울린다는 것도 안다.(실제로 얼마 전 나는 길거리 쓰레기 투척으로 벌금을 물기도 했다. (>_<);;) 업무상 배임, 공금횡령, 변호사법 위반, 뭘 갖다 붙여도 다 어울린다. 때묻은 나이다. 죄와 어울리는 나이. 나와 내 친구들은 이제 죄와 잘 어울린다. 안된 일이지만 청춘은 간” 것이다. (허연, 『나쁜 소년이 서 있다』, 「슬픈 빙하시대 2」, 민음사, 2008

그러므로 날이 저물어갈 무렵, 취기에 목마른 이들이 제각기 술집으로 향해간다. 거나하게 취한 정신이 낮 동안 쌓아놓았던 울분을 작은 술잔에 넘치도록 쏟아 붓는다. 개그맨 박성광은 매주 일요일 저녁, 우리 대신 외친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열패감이란 놈이 비싼 안주를 대신해 자꾸만 술을 재촉한다. 그러나 생의 연장을 최우선으로 하는 우리의 몸은 더 이상의 위험(알코올 중독, 생(生)의지 상실 (ㅡㅡ;;))을 피하기 위해 매우 적절한 시기에 수면욕을 불러들인다. 그러므로 결국 육체에 복종하는 우리의 정신은 “더러운 세상”을 고스란히 남겨놓고 눈 질끈 감아 내일을 맞이하러 떠난다.

또 다시 해가 뜨고, 새로운 날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지난밤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나” (허연, 같은 책,「간밤에 추하다는 말을 들었다」)는 어제의 울분을 내일의 희망으로 바꾸어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에 치욕스레 합류해 걸어간다. 그리고는 언제고 찾아올 부끄럼은 모르는 척 돌려보내고, 또 다시 세상을 향해 구시렁거리기 시작한다. 그렇게 나의 죄가 하나 더 추가된다.

말랑말랑해서 몸과 마음 모두가 헤맬 수 있었던 청춘은 가고 혼란스러운 마음을 안고 딱딱하게 굳은 비(非)청춘의 몸만 남았다. 더러운 세상의 모순, 그 자체가 되어버린 내가 서른을 기다리며 남아 있다.  -현선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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