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을 생각한다> - 또 하나의 가족, 또 하나의 얼굴 책, check, 책

김용철, <삼성을 생각한다>, 사회평론, 2010

 

삼성 법무실 시절, 김인주가 내게 이런 말을 자주했다. “몇 천만 원 주는 걸 무얼 그리 겁내느냐”라고. “이삼천만 원 때문에 벌벌 떨지 말라”고도 했다. 실제로 그들은 공직자에게 뇌물을 뿌리는 일에 대해 죄책감이 없었다. 오히려 자랑스러워했다. (175쪽)

몇 천만 원…. 이 숫자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 책에 나온 삼성 임원처럼 아무렇지 않게 웃을까. 하지만 아무렇지 않을 수 없다. (책에 언급된 것처럼) 등록금 때문에 사채를 썼다가 강남 룸살롱에서 접대부 생활을 하고 끝내 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한 21살 여대생을 떠올리지 않아도 된다. 월급 80만 원짜리 청소일을 더 이상 할 수 없어 생계가 막막한 어머니, 할머니들, 자식 학비 댈 능력 없어 떳떳하게 고개 들지 못하는 아버지들, 그리고 100군데 이력서를 넣었는데도 연락 없어 한없는 자괴감에 빠진 취업준비생들. 그들에게 “이삼천만 원 때문에 벌벌 떨지 말라” 할까. 

삼성 그룹의 수조 원대 비자금 조성, 광범위한 정관계 로비, 경영권 승계 작업 등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고백은 2007년 10월 29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기자회견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세상은 술렁였다. 하지만 김 변호사가 제기한 문제는 본질에 닿지 못했고, 대부분 내용은 유야무야 마무리됐다. 삼성은 여전히 잘나간다. 삼성전자는 사상 최대 영업이익을 올렸고, 이건희 회장은 특별 사면돼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으로 복귀했다.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서란다. 그리고는 이번 벤쿠버 동계올림픽 메달 수상자들에게 돈을 준다고 한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김용철 변호사는 삼성이 ‘관리의 삼성’이기 때문이라 말한다. 누구를 관리한다는 말인가. 누구도 관리할 수 있다. 삼성, 아니 이건희 회장 일가에 득이 된다면 말이다. 검찰 생활에 염증을 느끼기도 하고, 새로운 삶을 꿈꿀 무렵 김 변호사는 삼성에 들어간다. 경영 업무가 배우고 싶었다. 그런데 삼성이 그에게 가르쳐 준 것은 경영 잘하는 방법이 아닌 로비하는 방법이다. 그는 돈으로 정관계, 법조계, 언론계 인사들을 관리하는 것을 보고, ‘역시 관리의 삼성’이란 생각을 한다. 법과 정의가 통하는 사회? 일단 이 땅은 아니다.

삼성 VS 삼성, 그리고 한국

썩은 기름처럼 잘도 퍼져나간 이 돈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이건희 일가의 돈? 아니다. 김용철 변호사는 이것이 모두 삼성 계열사로부터 나온다고 한다. 책에서 이건희 회장의 돈이 사용된 건 아들 이재용에게 경영권을 승계하기 위해 건넨 종잣돈 61억이 다다. 이 맥락 속에서 ‘삼성’이란 이름 안에 있는 두 부류가 나눠진다. 이건희 일가와 그들에게 충성을 바치는 사람들, 그리고 회사를 위해, 혹은 먹고 살기 위해 일을 하는 사람들.

저자는 자신의 고백이 대부분 삼성 임직원의 이익에 반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비자금을 조성하고, 가족 중심으로 그룹을 경영해 막대한 손실을 불러오는 이건희 회장 일가다. 삼성이 연봉 많이 주는 기업으로 유명하지만 투명한 경영구조와 사업진행이 있었다면 그동안에 있었을 구조조정과 인원감축은 줄일 수 있었다. 그런 삼성에 ‘한국 국가대표 그룹’이란 딱지를 붙여놓고 세계에서 싸워보란 정부의 입장은 어둡고 무책임해 보인다. 

“자동차 사업의 실패는 이건희의 독선적 결정을 제어하지 못할 경우 한국 사회가 얼마나 큰 피해를 입는지는 잘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건희 일가와 삼성 사이의 관계가 바뀌지 않는다면, 삼성 자동차 실패와 같은 비극이 다시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다. (…) 삼성에서 자동차 사업 다음으로 큰 투자 손실은 미국이 망해가는 컴퓨터 회사 AST를 인수하여 1년 만에 1조 3000억을 날린 일이다. 인수하고 보니 유럽 등에 판매한 AST의 노트북 등에 대한 무상 서비스 비용을 계산하기 힘들 정도였다. 결국 청산시키고 말았다.” (266쪽)

이 책은 김용철 변호사의 일생을 건 고백이다. 삼성에서의 생활, 재판을 지켜보는 과정 외에도 이건희 일가의 호화생활, 삼성 무노조 경영의 이면, 삼성 그룹의 권력 관계, 김 변호사의 검찰 생활 등이 담겨있다. 그가 만난 전현직 삼성 임원들과 정관계, 법조계 인사들은 실명으로 거론돼 있다. <삼성을 생각한다>는 누구에게는 진실이고, 누구에게는 거짓이며, 또 누군가를 분노케 할 것이며, 누군가는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그럼 우리는 이 책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몇 천만 원 주는 걸 무얼 그리 겁내느냐”는 말이 개연성 있다고 생각한다면 김 변호사의 말 또한 심사숙고해 볼 문제다.

책을 덮어도 김용철 변호사의 수많은 고백이 어지러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닌다. 하지만 명백한 것이 있다. 하나는 법과 정의가 바로 서지 않았다는 점이다. (고 노무현 대통령 관련 수사와 이건희 회장 수사를 비교해 검찰이 후퇴하고 있다는 김 변호사의 주장은 타당하다.) 다른 하나는 경제의 민주화가 점점 요원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돈은 정의의 입을 막고, 비리는 돈의 손을 잡고 온다. 만약 이것이 모두의 방식이라면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에 산다 해도 우린 할 말이 없다. 돈이 정의인 사회는 또 하나의 가족이 사는 그들만의 세상으로 족하다. 

나는 삼성 재판을 본 아이들이 “정의가 이기는 게 아니라, 이기는 게 정의”라는 생각을 하게 될까봐 두렵다. 그래서 이 책을 썼다. (448쪽)


                                                                                          -반디(ak20@bandinlun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