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사람이 엄마를 데려 갔어요> - 행복한 상상을 되찾아줄 아이의 시선 책, check, 책

불라 마스토리, <눈사람이 엄마를 데려 갔어요>, 보물상자, 2009

 

어린 시절 우리에게는 지구가 둥글다는 과학적 사실과 함께 세계 평화 이념을 건전하게 가르쳐주던 동요가 있었습니다.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나가면 온 세상 어린이를 다 만나고 오겠네. 온 세상 어린이가 하하하하 웃으면 그 소리 들리겠네. 달나라까지.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이 노래를 부르고 있노라면 동심은, 열려 있는 세계를 향해 진취적인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하고, 나와 다른 세계 아이들은 소꿉친구와 같은 친근함으로 다가와 말을 거는 상상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어른이 된 지금, 이 노래는 더 이상 우리에게 행복한 상상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세계화의 긍정적인 비전 이면에 놓여있는 ‘하하하하’ 웃을 수 없는 현실의 단면을 보았기 때문이죠.

각국의 경계를 무화시키는 세계화의 흐름은 ‘앞으로 앞으로 자꾸 걸어 나가지 않아도 온 세상 어린이를 다 만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현재 인류가 누리고 있는 교통과 통신, 그리고 디지털 기술의 발달은 시·공간의 제약을 뛰어넘어 먼 곳의 사람들까지 어렵지 않게 한 공간으로 모이도록 해주니까요. 그러니 지금 아이들은 둥근 지구를 앞으로 걸어갈 일 없이, 자기가 살고 있는 곳에서 전 세계 여러 나라의 아이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만난 아이들 사이에서 ‘하하하하’ 웃는 소리 대신, “너, 니네 나라로 돌아가!”라는 매몰찬 소리가 들려오는 게 또한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렇게 자본의 흐름과 생계를 쫓아 이 나라에 찾아온 이주 노동자, 이주 결혼 (대부분 여성) 이민자, 그의 자녀(코시안)들 앞에서 「앞으로」라는 동요의 희망적 바람은 무색해집니다.

<눈사람이 엄마를 데려 갔어요>라는 아동도서는 그 사이 우리가 잊어버렸던 「앞으로」의 행복한 상상을 되돌려줍니다. 그리스인 아빠와 영국인 엄마를 반씩 물려받아 태어난 주인공 ‘반반이’는 그리스어로는 ‘이야니스’, 영어로는 ‘존’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입니다. 그리고 이 아이는 오늘, 우리의 현실 속에서 언제든지 마주칠 수 있는 우리나라의 반반이를 떠올리게 합니다. 게다가 반반이에게 하나의 국가정체성만을 강요하며 서로 싸우는 엄마와 아빠는 현실에서 어른들이 벌이는 갈등과 반목을 여실히 드러내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엄마의 손에 이끌려 영어 유치원에 가게 된 반반이의 이야기를 통해, 나와 다른 차이를 차별로 이어갔던 그릇된 태도를 되돌아보고, 보이는 그대로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아이의 시각을 빌어 잃어버렸던 동심의 세계를 다시 보게 됩니다.

모든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반반이 또한 유치원에 가면서 처음 엄마와 떨어지는 슬픔을 겪게 됩니다. 그러나 이제 엄마를 기다리며 울고 있던 반반이에게는 새로운 따뜻함이 전해져옵니다. 바로 ‘친구’들입니다. 누르스름한 피부에 눈은 가늘고 새까만, 늘 큼직한 수건 없이는 아무 데도 가지 않는 ‘수’, 얼굴은 새하얗고 머리는 샛노란 아이 ‘마틴’, 자기를 ‘가슴으로 낳은 아이’라고 소개하며 ‘엄마가 고른 아이’로서의 자부심을 드러내는 ‘피터’, 처음에는 매일 울다 잠만 잤지만 반반이의 ‘하이Hi’라는 인사에 웃기 시작한 짙은 커피색 피부의 여자아이 ‘네즈린’ 등은 그렇게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만나, 이제 막 세상에 나온 반반이의 길동무가 돼줍니다. 특히, 유치원에 처음 온 날에도 신기하게 울지 않았던 미스테리 숙녀 엘레니는 “나는 엄마도 둘, 아빠도 둘이야.”라며 엄마 아빠가 많은 걸 자랑해 아이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합니다.

이처럼 <눈사람이 엄마를 데려 갔어요>는 전지구적 세계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회가 정해 놓은 경계에 갇혀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어른들의 세상, 그 차별적인 시선의 세계를 전복시켜, 애초에 존재하던 서로의 차이 그대로를 재치 있는 시각으로 그려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다수의 삶의 방식만이 정상이라거나 정답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혼혈아, 입양아, 황인종, 흑인종, 백인종과 같은 말들도 필요하지 않게 됩니다.  다만 세상의 모든 아이들은 엄마와 아빠의 유전자를 반반씩 나누어 가진 반반이일 뿐이며, 엄마와 아빠는 하나씩일 수도, 둘씩일 수도, 혹은 없을 수도 있는 겁니다.

반반이가 유치원에 적응하고, 친구들과 만들어 놓았던 눈사람이 사라질 무렵, 엄마는 반반이의 곁을 떠납니다. 그래서 처음 유치원에 간 날과 달리 이제는 집에 돌아갈 시간이 되어도 엄마가 오지 않을 거라는 슬픈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아이, 반반이는 말합니다. 엄마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엄마, 엄마가 원한다면 아빠 국기를 버리고 엄마 것만 가지고 있을게.”
“존, 사랑하는 우리 아가! 두 사람 마음이 안 맞으면 헤어지는 게 오히려 나을 수 있어.”
“그렇지만 엄마하고 나는 마음이 맞잖아. 그런데 왜 헤어져야 해? 나도 엄마 따라 갈래.”
“여름 방학에 영국으로 와. 그때는 엄마 차례가 돼서 우리 존이랑 함께 지낼 수 있어.”

"들었지? 우리 아이들은 반반이인 것도 모자라서 어른들이 맘대로 우리를 나누어 갖는다. 우리를 반으로 자르는 거랑 같다."
(44-45쪽)

그리고는 눈사람이 사라지면서 엄마를 데려갔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아빠가 둘인 엘레니보다 ‘아빠가 눈사람’인 자신이 더 낫다!라는 기발한 결론을 내립니다. 그렇게 이전까지 우리가 결손가정이라고 낙인찍어 왔던 엄마의 부재를, 특별한 자랑거리로 만들 수 있는 아이의 시선이, 엄마 잃은 슬픔과 세상의 모든 차별적 경계를 넘어 '하하하하' 웃는 세계인에 대한 행복한 상상을 되찾아 주는 듯합니다. 

 

-현선(anejsgkrp@bandinlun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