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숨겨진 이야기 민용 in 재즈피플

<재즈피플> 안민용 기자의 책과 음악 이야기 No. 30 - 또 다른 숨겨진 이야기

「자유혼」

너는 이제 오지 않는가
여기 이 침잠의 포구에
꿈꾸던 자, 이젠 더 꿈을 꾸지 않는다 

* Album form 김두수, 『자유혼』 「기슭으로 가는 배」 중

2009년 노벨상 수상작가 헤르타 뮐러

해마다 많은 문학상들이 수상작 또는 수상작가를 발표한다. 반디앤루니스 인터넷 서점에도 ‘문학상 수상작’ 코너가 따로 마련되어 있을 정도인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노벨문학상, 퓰리처상, 아쿠타가와상, 이상문학상, 동인문학상 등을 비롯해 32개나 된다. 물론 실제로는 더 많다. 그런데 문학상이라는 것이 곧 문학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문학상마다 의도나 성격이 달라서 그에 부합하는 작품을 선정하기도 하고(가령 같은 작품으로 여러 신춘문예 응모해도 당선되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이 있다고 한다) 또 문학상이라는 의미 자체가 갖는 한정된 범주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한정된 범주는 다른 의미에서 ‘평균 이상’이라는 범주를 보여주기도 한다.  

문학상 중에서 가장 권위 있는 노벨문학상도 분명 문학적 ‘진리’는 아니다. 간혹 노벨문학상 수상작가들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역사의 재인식과 인류애의 강조는 과도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렇지만 언론의 관심이나 출판사의 홍보 등으로 그해 노벨문학상 수상작가들의 작품을 접할 기회가 많았고 또 실제로 훌륭한 작품들을 많이 만나기도 했다. 2000년부터 수상자로는 가오싱젠(프랑스), V.S. 나이폴(영국), 임레 케르테스(헝가리), 존 맥스웰 쿳시(남아프리카 공화국), 엘프리네 옐리네크(오스트리아), 해럴드 핀터(영국), 오르한 파묵(터키), 도리스 레싱(영국), 르 클레지오(프랑스)이며 2009년 헤르타 뮐러가 수상했다. <숨그네>는 그녀의 최근작이다. 

또 다른 숨겨진 이야기

헤르타 뮐러는 ‘끔찍하도록 가난하고 외진 마을’의 이야기를 전한다. “누군가가 마을을 떠날 때 바깥세상에는 언제나 재앙이 있었다. 조부는 일생에 단 한 번 그 마을을 떠났다. 일차대전에 징집된 것이다. 부친도 단 한 번 그 마을을 떠났다. 이차대전에 징집된 것이다. 부친은 나치 무장친위대였다. 어머니도 단 한 번 그곳을 떠났다. 전쟁이 끝나자 단지 독일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소련 강제수용소로 끌려간 것이다. 누군가 마을을 떠날 때마다 바깥세상에는 언제나 재앙이 있었다. 세상의 재앙이 그들을 고향 밖으로 불러낸 것이다.” (<헤르타 뮐러에게 다가가기> 66쪽) 가해자는 피해자가 되고, 피해자는 가해자가 된다. 이들은 직접 해를 가하지 않아도 가해자가 되고 어떻게 해도 피해자가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직면한다.  

 

<숨그네>에서 2002년 노벨상 수상작가 임레 케르테스의 <운명>의 단면을 발견했다. <운명>은 아우슈비츠와 부헨발트 강제수용소로 보내진 15세 소년 죄르지의 이야기이며, 시인 오스카 파스티오르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숨그네>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단지 히틀러의 동족인 독일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소련군에 끌려가 강제수용소에서 노역한 17세 소년 레오의 이야기다. 전쟁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을 뿐 아니라 살아있는 ‘죄르지와 레오’들에게 죄과를 치르게 했다. 같은 모습으로 대척점에 있는 이들에게, 강제수용소를 만든 주체가 소련이든 독일이든 큰 의미가 있었을까?

이와 관련해 지인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필자의 요지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 독일군이 자행한 끔찍한 참상을 소련이 같은 방법으로 복수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것이었다(헤르타 뮐러를 통해 전후 또 다른 강제수용소가 존재했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소련의 강제수용소는 홀로코스트 같은 대참사를 빚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지인의 의견은 조금 달랐다. 보복한다고 피해가 없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 자체로도 또 다른 잘못을 만드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제 끝났으니 잊고 잘 살자 라는 식으로 응수할 수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피해자는 그 고통을 감수하며 살아야 하느냐고, 65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역사를 그 당시에 털어버릴 수 있었겠느냐고 했다. 피해자의 입장이 되지 않고서는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없겠다 싶어 다른 말을 하기가 어려웠다. 이성을 앞세워 이야기하기에는 고통이 너무 큰 역사다. 

다 잃어도 인간임을 잊지 않기를

한편 <숨그네>가 <운명>을 떠올리게 한 이유 중 하나는 표현에 있다. 강제수용소에서 겪은 삶을 분노나 공포 등 직접적인 언어로 드러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섬세한 언어와 객관적인 표현으로 드러내고 있다. 헤르타 뮐러의 표현법은 직설적이면서도 우회적이고, 거칠면서도 우아했다(개인적으로는 그녀의 독특한 조어법을 어떻게 번역했는지 궁금했다). 문학의 유용성이 행동하는 것에 있다면 뮐러의 언어는 문학적 유용성을 잘 보여준다. <숨그네>를 읽는 동안 가려웠던 머리, 그리고 허기진 듯 글을 읽고 밥을 먹어야 했던 감정은 뮐러의 언어가 전해주는 감동의 다른 표현이었다. 

올해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65년이다. 65년이 지났지만 역사는 아직도 고통 속에 시름한다. 그리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드러나지 않은 채 숨그네(죽음과 삶 사이를 드나들면서 가쁘게 흔들거리는 것을 의미하는 뮐러의 조어)를 탄다. 시간이 지나면 잊힌다고 하지만 그건 지워지는 게 아니라 가려지는 것이다. 그들이 시간 속으로 사라질수록 우리는 더 허기진다. 허기진 이유를 잊어가며 채워지지 않는 허기로, 늘 배고플 것이다.   

“배고픈 천사는 이제 뇌 속이 아닌 목덜미에 올라앉았다. 그리고 배고픈 천사는 기억력이 좋았다. 아니 특별히 기억력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수용소의 유행 역시 일종의 배고픔, 눈(目)의 허기였다. 배고픈 천사가 말했다. 그렇게 가진 돈을 모조리 써버리지마, 앞일은 모르는 거야. 올 것은, 이미 다 왔어. 나는 생각했다.”(<숨그네> 282쪽) 

 <재즈피플> 안민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