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인간인가> - 그때 그곳을 기억해야만 하는 이유 책, check, 책

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돌베개, 2007 

 


“우리는 처음으로 우리의 언어로는 이런 모욕, 이와 같은 인간의 몰락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순식간에, 거의 예언적인 직관과 함께 현실이 우리 앞에 고스란히 정체를 드러냈다. 우리는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밑으로는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었다. 이보다 더 비참한 인간의 조건은 존재하지도 않았고 상상할 수도 없었다.” (34쪽)

“그들은 끊임없이 교체되면서도 늘 똑같은, 침묵 속에 행진하고 힘들게 노동하는 익명의 군중·비인간들이다. 신성한 불꽃은 이미 그들의 내부에서 꺼져버렸고 안이 텅 비어서 진실로 고통스러워할 수도 없다. 그들을 살아 있다고 부르기가 망설여진다. 죽음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지쳐 있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 앞에서, 그들의 죽음을 죽음이라고 부르기조차 망설여진다.”
(136쪽)

이것이 인간인가.

프리모 레비가 독자에게 던지는 이와 같은 물음은 인간의 정의에 대한 우리의 오래된 물음, ‘인간은 무엇인가’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이 둘은 분명히 같지 않다. ‘인간은 무엇인가’는 어떤 인간으로부터 출발했지만 이미 어떤 인간들로부터는 너무 멀어져 있는 ‘인간’이라는 말, 그 추상적 개념을 고민하며 그것을 지칭할 만한 ‘무엇’을 찾아 헤매게 한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인가’는 프리모 레비의 증언을 통해 실제로 존재했던 ‘이것’이 우리 앞에 이미 던져져 있는 상태로, ‘이것’에 대한 판단의 필요성을 현실화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인간’의 의무처럼 부과된 이 질문에 끊임없이 마주하며, 그때마다 되물어야 한다.

이것이 인간인가.

이 책에는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제3수용소에서 보낸 프리모 레비의 10개월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 안에 모든 것을 빼앗긴, 숫자화-출신, 인종 등을 표시하는 수인번호-된 사람들의 삶, 아니 오히려 죽음이 있다. 나치즘과 반유대주의가 만들어 놓은 수용소라는 공간이 있고, 그 공간이 만들어낸 또 다른 세상이 있으며, 그 세상에서 새롭게 발견되는 인간 혹은 비인간의 삶의 방식이 있다. 말하자면, 우리처럼 ‘자유로운 인간’들은 알 수 없거나 알려고 하지도 않을 ‘이것’들이 집단적 광기의 참혹한 결과로서 지나간 역사의 한 장면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의 몸에 새겨진 문신(수인번호 174517)처럼 끝끝내 지워지지 않는 일들이 그때 그곳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며.

이에 따라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인간’, ‘인간적’이라는 말에 내포된 윤리의 기준은 피할 수 없는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적어도 인간이라면’, ‘인간이 어떻게 그럴 수 있나’와 같은 인간 행위에 대한 최후의 보루마저 무기력하게 포기당하는 순간, ‘적어도 인간’인 그들-나치스트-은 ‘그럴 수 있’고, 그들에게 유린당한 유대인들의 삶이 또한 ‘그럴 수 있’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렇다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다음 질문은 무엇인가. 왜 우리는 그때 그곳의 ‘아주 특별한 사태’를 기억해야 하는가. 

분명한 것은 이러한 질문의 끝에 분노와 비난이라는 감정적 결과물만이 남겨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그것을 이해하려고 애써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프리모 레비가 지적하듯, 유대인에 대한 나치즘의 증오는 인간의 내부가 아닌 인간의 밖에 있는 것으로,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서 태어났는지는 이해할 수 있고 이해해야 하며 경계해야만 한다. 그것을 이해하는 게 불가능하다면 인식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과거에 벌어졌던 일이 되풀이될 수 있기 때문이며 의식이 또다시 유혹을 당해 명료한 상태를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의식까지도.” (302-303쪽) 우리는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끝없는 절망에서 태어난 프리모 레비의 이토록 아름다운 언어가, ‘그때, 그곳’이 아닌 ‘어느 때, 어느 곳’에 대한 경고로 우리를 이끌고 있다. 

 

-현선(anejsgkrp@bandinlun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