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잉 아이> - 난 내가 지난 밤에 한 일을 알고 있다 블로거, 책을 말하다

 

히가시노 게이고, <다잉 아이>, 재인, 2010 

 

난 네가 지난밤에 한 일을 알고 있다.

난 내가 지난밤에 한 일을 알고 있다.

난 내가 지난밤에 한 일을 알고 있어야 한다.
 


<다잉 아이>의 겉표지는 굉장히 섬뜩한 이글거리는 눈으로 장식되어 있다. 아무것도 없는 무한한 하얀 공간에 떡하니 나를, 당신을, 우리를, 한 눈동자가 주시하고 있다. 표지 한 꺼풀을 벗기면 어두컴컴한 공간에 뻥 뚫린 눈동자가 나타난다.

1. 눈에 관하여

인간은 두 가지 종류의 눈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외부세계를 인식하기 위한 눈으로서 모든 감각기관 중 제1의 인식기관이 그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부세계를 보는 눈으로서 양심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눈은 각각 별개로 작동하는 것은 아니며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눈을 통하여 모든 사물의 형체, 색체 등을 파악하며, 그것을 통하여 자신의 세계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외부세계와 내부세계는 눈을 매개로 하여 하나의 완전한 세계로 된다. 주관과 객관의 형식으로 표현되는 현상들이 눈을 통해서 들락날락거린다. 그것을 통해서 모든 사물의 존재가 인식되고, 그것의 눈을 통해서 자신을 인식하게 된다. 그 곳에 내가 있고, 내 안에 타인, 사물이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이지만, 결코 인간이 아니다.’ 양심의 눈이 결핍되면 그는 인간이 아니다. 인간이기 위해서는 위의 두 가지를 다 갖추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동물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인간이 아닌 이들이 너무나 많다.

2. 의지에 반하는 죽음에 관하여

자연적인 죽음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흘러가듯 자연에서의 죽음은 하나의 법칙으로서 그렇게 나타난다. 그러나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죽음을 맞게 된다면 그 의지는 강력한 거부반응을 보이며, 그것은 두려움으로, 분노로 그리고 원한으로 나타나게 된다. 자신이 상대방의 삶에의 의지를 단절시키는 가해자라 한다면, 나로 인해 극심한 고통을 받고 있는 피해자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자신이 있는가? 제대로 된 인간이라면 결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는 못할 것이다. 그것으로 자신이 고통을 받게 되고 따라서 측은한 마음으로 자신의 행위를 중단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양심이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언제나 자신을 내부에서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이는 제3자의 눈처럼 자신과의 사이에 벽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눈이다. ‘난 네가 지난밤에 한 일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난 내가 지난밤에 한 일을 알고 있는 것’이다.

인두겁을 쓴 자들은 타인을 자신과 완전히 다른 존재로 인식하고 타인의 고통, 괴로움을 자신의 쾌락의 수단으로 여기는 최악의 이기심의 덩어리일 뿐이다. 단지 동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이런 짐승들은 지금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들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는 자들일 것이다.

3. 소설 속의 눈에 관하여

신스케는 많고 많은 기억들 중에 유독 지난밤에 일어난 사건(교통사고)에 대한 것만 기억을 상실한다. 그는 ‘난 내가 지난밤에 한 일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양심이 무의식적으로 지속적으로 작동하여 그 기억을 찾으려 한다. 뭇사람들은 그러한 기억은 생각하기도 싫은 고통, 고뇌이자 불행이기 때문에 굳이 이미 지나가버린 일들 들추어낼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기억의 파편이 아무리 불행 그 자체일지라도 그것이 현재를 사는 인간의 입장에서 중요하고 가치가 있는 것이라 ‘느껴진다면’, 즉 바로 양심이 그것을 보려고 한다면 더 이상 그것은 아무런 상관없게 된다. 기억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찾고자 하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양심이란 항상 자신의 존재를 알고자 하는 우리 자신에 대한 앎, 조금씩 충족되는 행위에 대한 기록이다. 양심의 주제는 언제나 행위에 대한 것이며 바로 이 앎을 통해 우리 자신에 대해, 우리가 무엇인 존재에 대한 만족과 불만족이 자란다”
고 한 쇼펜하우어의 말은 정확한 지적이다. 신스케 주변의 인두겁을 뒤집어 쓴 짐승들의 몸짓을 통해(이들은 이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인간이 아니다. 그러니 그가 계속 어둠 속을 거닐 수밖에 없었던 것도 당연하다) 그리고 어느 날 ‘필연적으로’(왜 우연이 아닌 필연인가? 읽어보라) 등장한 한 여인을 통해 그는 자신을 찾게 됨과 동시에 자신의 눈을 조금씩 인식하게 된다. 그녀와의 정사에서도 인간의 내부에 잠재하고 있는 그 눈은 그 모습을 드러내려고 한다. 그것이 양심이라 불리는 눈의 본질이다. 경험(기억)은 행위의 저장고이자 보편성의 보고이다. 그리고 그것은 양심의 문을 여는 열쇠이다. 양심의 대상은 언제나 행위인데, 행위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니 양심이 들어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양심은 무의식의 형태로, 기시감, 데자뷰로서 언제나 인간의 내부에 잠재되어 있다. ‘어느 날 나타난 그녀’는 일종의 상징으로, 그리고 이 소설 전체는 양심이 의식화되는 과정이 일종의 알레고리로 형상화되었다.

<다잉 아이>는 인간의 양심에 대한 이야기이다. 보편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혹자는 지루하리라 오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셰익스피어나 세르반테스의 작품들이 수세기가 지나 시대가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불멸의 존재가 된 이유는 그것이 인간의 본질에 대해, 바로 현재를 사는 인간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보편적인 것의 힘은 이와 같다. 인간의 이기주의가 어디까지 극대화되는지, 즉 인간의 욕망, 두려움, 분노, 고통, 탐욕이 얼마나 더러운지 <다잉아이>를 통해 다시금 보게 된다. 인간이기 위해, 아니 인간이므로 ‘Dying Eye’와 같은 눈을 우리는 어두컴컴한 심연에서 끌어올려야 한다. 우리 사회에는 인간이지만, 결코 인간이 아닌 자들을 너무나 손쉽게 찾아볼 수 있으니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자라면 항상 우리의 눈을 밝히고 있어야 할 것이리라.

왜 <다잉 아이(Dying Eye)>인지, 왜 겉표지의 눈이 부릅뜨고 마치 나를 바라보는 것처럼 느껴지는지, 그 표지를 벗겼을 때 끝을 알 수 없는 어둠으로 가득 차 있는지를 깨달아야 할 것이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crazyforb'님은?
꿈을 향해 발을 내딛으며 자신의 존재를 찾고자 하는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인간'. 철학, 정치, 역사, 법, 고전문학 그리고 경험을 통해 세상의 이치, 인간의 본질에 대해 사색하는 작은 '인간'. 독서를 위한 독서가 아닌 삶을 위한 독서를 하는 뼈와 살을 가진 '인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