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 바이> - 나를 향한 여정: 나란 녀석은... 블로거, 책을 말하다

 

다자이 오사무, <굿 바이>, 예문, 2010 

 


<굿 바이> 그리고 1948년 투신자살로 생을 마감한 ‘다자이 오사무’

책의 제목 <굿 바이>와 ‘자살’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그래서 여기에 담긴 글들이 생에 대한 부정, 환멸, 그리고 고통과 고뇌로 점철된 삶에 대한 내용일 것이라는 허상을 독자들의 뇌리에 심어놓는다. 무엇보다 "그가 우리에게 보낸 ‘마지막’ 인사", "‘마지막’ 작품", "고뇌로 점철된 삶을 ‘자살’로 끝낸 다자이..."와 같은 문구가 책의 표지를 장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단편을 하나하나 읽어감에 있어서 이는 하나의 장애가 되었다. 그래서 난 끊임없이 ‘자살’과 연관시키려는 편견과의 싸움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마치 다음의 경우와 같다. 흔히들 쇼펜하우어를 염세주의 철학자라 하여 그가 자살을 권장하며 살았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는 염세적이라는 추상적 개념으로부터 밑도 끝도 없이 확장해석한 어느 길거리 지식인의 헛소리일 뿐이고, 정작 그는 자살을 하라고 입에 올린 적이 없었다. 오히려 생을 장려한 철학자였다.

그는, 저자의 본서를 읽어보지도 않고 요약본이나 다른 사람이 쓴 글을 보고 혹은 어디서 주워 듣고 마치 그 저자의 사상을 다 알고 있는 듯 떠벌리고 다니는 자를 경계하라고 말하였다. 타당한 말이다. 따라서 난 이 책을 백지상태로 읽었음을 밝히는 바이다. 당연히 당시 일본의 시대상황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음은 물론이다. 다만 각 작품이 연재된 년도만을 기재함에 그치겠다. 조금이라도 역사에 대해 아는 사람이라면 어떤 상황일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단편선집에 실린 여섯 편의 작품은, 표현 하나하나가 아이러니하고 모순적이어서 읽는 재미가 쏠쏠할 뿐만 아니라 인간을 바라보는 깊이 또한 심오해서, 사색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처음 읽었을 때와 두 번째 읽었을 때 그 느낌은 매우 다르다. 세 번째, 네 번째야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오히려 점점 입가에 웃음을 띠는 건 왜일까? ‘그’처럼, 이상과 닮았다는 ‘그’처럼, 글을 남긴다.


추억 (1933년)

수많은 기억의 파편들 속에서 건져 올린 추억이라는 산물.

자긍심이 강한 유년기 시절. 타인의 시선을 끊임없이 의식하며 살아가야 하는 성질을 안고 태어난 나약한 존재. 그러했기에 그는 좀처럼 실수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집안사람들이 형제 중에 제일 못생겼다고 여기는 내가 멋을 부린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모두에게 웃음거리가 될 거라는... 그래서 오히려 옷에 관심이 없는 척 행동했고 어느 정도 성공하기도 한 것 같았다.”
(18쪽)
“내 얼굴에 열 겹 스무 겹 덮여 있는 가면 때문에 무엇이 슬픈지 그리고 얼마나 슬픈지 확인할 수조차 없었다.” (42-43쪽)
“여드름이 욕정의 상징이라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질 정도로 부끄러웠다. 차라리 죽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45쪽)

그는 언제나 타인에게 가면을 쓴 상태였다. 좀처럼 자신의 성격을 드려내려고 하지 않는다. 양파껍질처럼 언제나 벗기면 벗길수록 그 속을 알 수 없는 녀석이 바로 ‘그’였다. 하지만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 전혀 알지도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보다야 낫지 않겠는가...

추억이란 훗날 자신의 기억 속에서 끄집어낸 것이기에 그 안에서는 담담함이 느껴진다.

‘그래! 그때 난 이런 존재였지... 그리고 지금도 여전한걸! 여전히 바퀴는 뒤틀려 돌아가고 있어! 피식!’

이런 소리가 내 귓가에서 맴도는 것 같다.


역행 (1935년) - 네 편의 단편

<나비> 겨우 25세를 넘은 나이. 노인이라 할 수 없지만 노인인 존재. 보통 사람보다 세 배 이상의 경험을 해야 했기에 삶에 대한 열정 없이는 절대 도달할 수 없는 위치가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자리이다. 삶에서의 하나하나의 말과 행동들은 누군가가 써 놓은 대본대로 이루어진 것이었을까? 그에게 있어서 자신의 존재 가치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백 편이 넘는 소설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그중 어느 작품도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은 없었다."
(66쪽)
"그의 긴 생애에서 거짓이 아닌 것은 태어남과 죽음 단 두 가지뿐이었다." (67쪽)

자신의 존재, 본질은 ‘나비’와 같은 것이었을까? 마치 장주와 같은 경험을 자신이 하고 있다고 ‘일부러’ 자위해보는 그의 태도는 거짓과 진실의 모호한 경계를 넘나든다. 진심에서 써 본 적이 없는 소설의 인물처럼 노인은 ‘팥죽’을 먹고 싶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여자’와 놀고 싶다 했다. 무엇이 거짓이고 진실일까? 거짓 속에 진실이 있고, 진실 속에 거짓이 있듯이, 그는 푸른 나비, 검은 나비, 혹은 옥색 나비가 되어, 마치 존재가 비존재이고 비존재가 존재인 것처럼, 그렇게 날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한 장 남짓한 이 글은 굉장히 묘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도적> 대학생활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도적. 세상에 보기 드문 뒤틀린 자. 일찍이 예술가는 사람을 죽이지 않고 물건을 훔치지 않는다. 다만 하찮고 약삭빠른 인간일 뿐이다.”
(73쪽)

선택받은 ‘수재’들이 모두 노트에 필기된 똑같은 문장을 읽고 일률적으로 암기하려고 애쓰는 공간 속에서 그는 슬픈 도적이었다. 그는 그러한 존재였다.

<결투> 고등학교 시절의 일화다.

그는 타인의 시선을 등에 달고 산 존재였다. 그래서 자신의 의지의 목소리와는 달리 가상의 목소리를 내던 존재였다. 하지만 결국 비존재는 존재에 굴복하고 만다. ‘결투’는 자신과의 싸움이었으며,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인식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진흙탕에 엎드려 지금이야말로 엉엉 소리 내어 울어야 한다고 안달했지만 비참하게도 눈물은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84쪽)고 했을 때는 이글을 쓰던 다자이 오사무의 모습이 떠올라 절로 입가에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검둥이> 유년시절의 이야기로 역행한다.

검둥이는 무엇이었을까? 사람들의 태도와 소년의 태도의 차이는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이는 직접 읽어보고 느껴야 한다) 그는 이글에서도 자신이 어떠한 존재였는지를 ‘은밀히’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 유년시절이기에 소년은 존재를 뚜렷이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성인이라 하여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그래서 다시 <나비>로 ‘역행’할 수밖에 없다.


망치소리 (1947년)

탕탕탕! “空”

일, 사랑, 학문, 예술, 이념, 이상 등. 인간의 모든 행위가 궁극적으로 도달하는 지점은 허무, ‘空’이다. ‘탕탕탕’ 망치소리가 들리면 자신이 행하던 모든 일이 허무함으로 가득 차게 되고, 그것마저 깨뜨리는 미지의 적막감에 휩싸이게 된다. 도대체 인생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 우리는 달리는 것일까? 학교 달리기 경기처럼, 직장인 마라톤 대회에서처럼 단지 자신의 존재를 위해 우리는 달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아무리 ‘허무한’ 열정일지라도, 그것은 ‘덧없는 노력의 아름다움’(역행 <도적>에서)의 칭호는 받을 자격이 있다. 보이지 않는 의지에 의해, 바로 자신에 의해 인생의 길은 앞으로 계속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육신을 죽일지라도 영혼을 죽이지 못하는 자를 두려워하지 마라. 육신과 영혼을 지옥에 던져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무서워하라.”
(114쪽)<마태복음 10장 28절>

끊임없이 자신을 향해, 자신의 인생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용기를 지닌 바로 자기 자신이야말로 가장 두려운(경외) 존재인 것이다. 육신과 영혼을 지닌 자이니 말이다. 그러니 알 수 없는 심연에서 ‘탕탕탕’ 울려 퍼지는 소리에 대한 고민은 해결된 셈이다.


아침 (1947년)

행간의 심리묘사가 탁월한 명작.

세 장 남짓한, 그야말로 단편이다. 하지만 짧은 시간 내에 ‘나’의 기질을, 성격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는 도덕과 본능, 색정, 욕심 사이의 경계를 촛불을 매개로 하여 교묘히 오가며 고뇌하고 또 고뇌한다. ‘나’는 촛불이 켜져 있는 동안은 이성이 지배하는 존재이나 촛불이 다 타들어가는 순간 본능에 의해 동물로 될지도 모르는 존재임을 자각하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순간이 도래했을 때, 아침이 밝았다. 피식!

이것은 도덕적으로 보이고 싶은 한 나약한 인간의 익살스러운 모습이었다.


굿 바이 (1948년)

아이러니를 통한 존재의 지속적인 뒤집기.

이 작품의 주인공인 다지마 슈지는 다자이 오사무(본명은 쓰시마 슈지)를 여타의 작품처럼 투영한 인물이다. 그는 타인의 눈을 굉장히 의식하는 인물로서 허영심이 강하고 완벽하고 쿨해 보이고 싶은 결벽증이 있는 존재이다. 그래서 겉으로 드러난 그의 삶의 모습은 그 자신의 본질과는 다른 허상일지도 모른다. 이미 <나비>나 <결투>에서 보지 않았던가! 그런 그이기에 수많은 정부와 헤어지기로 결심하였을 때 ‘그’는 쿨해 보이려고 한다. ‘도덕’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면서 말이다.

‘도덕’적인 인물로 비춰지고 싶은 자. 그래서 ‘도덕’을 들이대며 기누코의 버릇을 고쳐준다는 명분으로 ‘겁탈’하려다 괴력의 소유자에게 두들겨 맞고 “꽥!”하고 소리 지르며 도망치는 그는 <내 반생을 말하다>에서 밝힌 것처럼 나약한 기질을 지닌 존재였다.

이러한 아이러니한 모습은 기누코에게서도 찾을 수 있다.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아름다움을 지닌 그녀. 하지만 그녀는 외적인 ‘아름다움(美)’과 달리 목소리는 ‘까마귀소리’ 같았고, 엄청난 물욕, 식욕, 탐욕으로 가득찬 인물이었으며, 무엇보다 괴력의 소유자였다.

그리고 그녀의 방은 돼지우리처럼 지저분하였다. 하지만 벽장안은 외부 공간과는 달리 청결, 질서정연함이 가득한 향기가 배어있는 것이 아닌가! <나비>로 역행해 보자! 왜 이렇게 웃음이 나올까! 어쩌면 우리들은 다지마 슈지처럼, 기누코처럼 그 존재를 가늠할 수 없는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단지 정도의 차이에 불과할 뿐. “꽥!”

<굿 바이>는 그의 정부들에게 이별을 고하는 애조 섞인 작별인사, 바로 쿨해 보이고자 하는 인사이다. 그러기에 ‘행진’(소제목)이라는 당당한, 그야말로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포장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언제까지 쿨~해 보이고자 할까”

이것이 그의 본질이라면 그와 함께 그것을 받아들이고 웃어야겠다. 그것이 그의 삶, 인생이니까!
 

오늘의 책을 리뷰한 'crazyforb'님은?
꿈을 향해 발을 내딛으며 자신의 존재를 찾고자 하는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인간'. 철학, 정치, 역사, 법, 고전문학 그리고 경험을 통해 세상의 이치, 인간의 본질에 대해 사색하는 작은 '인간'. 독서를 위한 독서가 아닌 삶을 위한 독서를 하는 뼈와 살을 가진 '인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