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와 운명> - 운명인가 숙명인가 블로거, 책을 말하다

카를로스 푸엔테스, <의지와 운명>, 민음사, 2010 


잘린 머리가 '이제서야' 잔혹하게 잘려나간 몸뚱이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성의 대명사인 머리는 감성, 감정, 욕구, 혹은 욕망의 대명사인 육신(몸뚱이)을 저급하고 더러운 것으로 격하시키고 자신이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지배하는 왕인 줄 착각하고 있었다.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선험적으로 인식하고 그것들의 형식을 통해 모든 사물을 인식하는 이성. 그는 '인간은 이성적 존재'라는 권위 있는 명제를 앞세워 우리 신체의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였고 모든 이치의 왕이 되었다. 그러나 이성은 어디까지나 현상과 원인을 설명하는데 존재이유가 있는 것이지 사물의 본질에 대해서 그것만으로는 어떠한 설명을 하지 못한다. 오성에 의해 파악한 자료와 직관을 풀어헤치는 설명서. 바로 이성은 추상적 개념간의 관계를 완성하여 그것들을 이해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렇다. 머리는 단지 존재의 한 부분일 뿐이다. 여호수아의 잘린 머리는 멕시코 게레로 주 연안, 태평양 바닷가에서, 몸뚱이가 떨어져 나가고 나서야 그것에 대한 기억을 더듬고 있다.

밤에 대한 묘사로 시작하는 프롤로그는 마치 인류의 역사를 그려내는 듯하다. 여명이 밝아 오고, 대낮이 되었을 때 한 덩어리였던 모든 사물을 명확하게 분리시킨 빛처럼, 인간은 이성의 눈을 떴으며 만물의 영장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 하지만 머리가 잘린 지금, 머리는 몸뚱이를 기억하고자 한다. 마치 구조주의에서 해체주의로 나아갔듯이, 합리주의에서 실존주의, 생철학 등으로 뻗어나갔듯이, 이제는 다른 무엇을 찾고자 한다. 과연 몸뚱이는 무엇이었을까? 의지? 감정? 운명? 숙명? 나, 여호수아는 어떠한 존재였을까?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은 내 머리가, 오로지 내 머리가 진술하는 것이며, 머리에서 떨어져 나간 내 몸뚱이는 이제 하나의 기억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기억에 대해서는 현명한 독자 여러분들의 판단에 맡기고자 한다."
(1권 19쪽)

잘린 머리가 밝히듯이, 이 이야기는 몸뚱이가 '직접적으로' 기억하는 것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머리가 '이차적으로' 기억하는 것을 추상적 언어로 펼쳐 보인다는 한계 때문에 확실성과 불확실성 사이의 모호한 경계를 넘나든다. 잘린 머리가 '기억'하는 이성과 감정들, 그리고 과거와 현재, 미래를 왔다갔다 하는듯한 표현, 예언자 에제키엘과의 만남, 죽은 안티구아 콘셉시온(Antigua Concepcion)과의 대화, 죽은 마키아벨리와의 대화, 모호한 진실. 이 모든 것이 나를 애매모호한 경계로 몰아세웠다(이렇게 추상적으로 쓴 이유는 이것 역시 이 소설에 대한 나의 알레고리이기 때문이다).

1. 운명

 ▷ 이름, 명칭에 의한 운명
'여호수아 나달(Josue Nadal)'과 '예리고(Jerico)'. 1부에서 등장하는 그들은 고아이다. 예리고는 성이 없다. 여호수아의 경우도 나달이라는 성이 있으나 그것은 하나의 장식품일 뿐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마치 스페인어 중 nada(아무것도~아니다 혹은 無라는 의미)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이는 나달이라는 姓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姓이 있다는 것은 특정 부모로부터 태어났음을 의미하며 이는 그들로부터 특정 성향을 물려받았음을 추측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그것은 마치 손님들의 과거사 한 꼭지만 들어도 손님의 미래를 분명하게 상상할 수 있는 헤타라 창녀의 능력과 같다. 따라서 성이 없다는 것은 자신의 인생에 그 어느 누구로부터도 간섭받지 않음을 상징한다. 바로 그들의 인생, 운명은 그들의 의지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 그래서 예리고는 무척 독립심이 강하고 그와 어울리는 여호수아 역시 그렇게 변해갔다(아니 그런 것처럼 보였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리라).

무엇보다 이러한 운명적 상징성은 29쪽부터 34쪽까지 삽입되어 있는 여호수아의 구약성서의 내용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이스라엘 민족이 약속의 땅을 찾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는 운명의 수레바퀴에서 '여호수아'는 '최초'의 도시인 '예리고'를 점령한다. 이러한 성서의 내용대로 여호수아는 예리고와 최초로 친구로 만나게 되었다. 이것은 바로 이름이 부여한 운명 그대로였다. '본능적인' 그들의 우정! 기억하라. '본능적이다!'

또한 이름에 의한 운명은 1부의 '카스토르와 폴룩스' 그리고 4부의 '카인과 아벨'의 제목에서도 상징적으로 부여된다. 이들 각각은 그리스 로마 신화와 성경에서 차용한 것인데, 알다시피 이들은 형제라는 점에서 일치한다. 그러나 전자는 우애가 매우 돈독하다는 점에서, 후자는 증오심에 사로잡혀 살인한다는 점에서 그 차이가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저자는 카스토르와 폴룩스의 관계가 카인과 아벨의 관계로 변한다는 운명에 대한 암시를 주고 있다.

이러한 시각은 작품 곳곳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데 다음의 예를 보자.

"창녀들은 자신들을 '여성'이 아니라 '늙은이'라고 부르는 남자들에게 화를 내기 마련이다. 늙은이라는 것은 창녀, 잡동사니, 쓰레기통, 반죽냄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여성은 부인이나 어머니가 될 수 있는 애인이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1권 329쪽)

이는 인간이 얼마나 '언어' 즉 '추상적 개념'에 의한 운명이라는 굴레의 수레바퀴에 짓밟히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무릇 존재는 그 자체로 하나의 존재임에도 언어에 의해 일정한 모습으로 고착되어 버리고 만다. '이름' 혹은 '명칭'은 그 존재의 일부분일 뿐임에도 그것이 거꾸로 존재 자체가 되어버리는 식이다. 늙은이로 불리는 순간 그녀들은 창녀, 잡동사니의 운명이 되어 버리고, 여성으로 불리는 순간 그녀들은 희망을 보게 된다.

▷본성, 성격에 따른 운명
그러나 이러한 이름, 명칭 즉 추상적 개념에 의해 결정된 운명은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크게 흔들린다. 아무리 화려한 미사여구로 어떠한 존재를 장식한다한들 본질, 본성에 따른 운명의 힘 앞에서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아무리 사라 페레스가 상류층 여자들의 몸가짐을 완벽하게 모방했다 하더라도, 하류층 여자들의 추잡스러운 행실을 그대로 실행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이러한 힘 때문이었다. 자신만의 고유한 냄새는 지워버릴 수 없는 법이다.

▷거대한 '힘'에 따른 운명
하지만 무엇보다 인간이 자유의지로 자신의 운명을 선택하고 개척해 나간다는 자만심, 자신만만함을 세상에 드러내 보일 때, 간과하기 쉬운 것이 바로 사회, 국가, 관습, 규범, 역사와 같은 가장 강력한 보이지 않는 '힘', '흐름'이다.

이러한 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 제1부 <카스토르와 폴룩스>에서 필로파테르(Filopater) 신부와 관련된 이야기에 등장한다. 그의 대화에서는 베네딕투스 스피노자에 대한 이야기가 항상 등장하는데, 이것은 그의 인생에 대한 암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의지와 운명>에 대한 거대한 알레고리이다.

스피노자가 기거하는 방에는 거미 한 마리가 '자신만의 의지'로 만든 세계의 왕으로서 살고 있다. 그러나 이내 스피노자가 길거리에서 동종의 거미를 구해와 그만의 세계에 개입시킨다. 자신의 의지와 타인의 의지와의 충돌이 일어나고 하나의 세상에서 '왕'이 되기 위해 그들은 싸움을 벌인다. 스피노자는 이에 그치지 않고 파리 한 마리를 거미줄의 세계에 집어 던진다. 그 거미들은 파리를 잡아먹고 다시 서로를 잡아먹기 위해 싸움을 벌인다.

인간은 위의 거미처럼 자유의지로 자신의 세상을 만들며 살고 있다(아니 그렇게 믿으며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무엇'인가의 의지와 대립하며 충돌하게 되고 그것에서 살아남기 위해 투쟁하며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진 비극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그 무엇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위의 '동종의 거미'와 같이 타인일 수도 있고, '스피노자'와 같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일 수도 있다. 그것은 유행, 관습, 규범, 제도, 사회, 국가라는 운명의 울타리이다.

2. '필연'과 의지와 운명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타인과 관계를 형성하는 '사회적 동물'이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정한 가정, 사회, 국가, 관습, 규범에의 구속. 특히 부모, 자식 간의 관계는 혈연으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필연'이라는 이름으로 각자 부모로서, 자식으로서의 '의무'를 부담하고 있다. 그것은 굳이 윤리, 도덕, 의무라는 이름을 가져다 붙일 필요도 없는 당연한 것이다.

"저는 지금 필연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받는다는 느낌, 내가 필요한 존재라는 기분, 육신의 정, 따뜻한 애정…"
(2권 206쪽)

필연을 전제로 하지 않은 의지와 운명이란 어떠한 것일까? 마치 어린 시절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난 여호수아와 예리고처럼 자신이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고 만들어간다고 '착각'하며 살지 않을까? 그렇다. 그야말로 착각이다. 이 소설의 비극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머리가 잘려나갔기 때문에 비극적인 것이 아니라 '무엇(직접 읽어보시라. 얼마나 비참한지. 얼마나 개인의 의지에 따른 인생이 하나의 착각에 불과하였는지. 얼마나 보잘것없었는지를!)'에 의해 놀아났다는 점 때문에 말이다.

필연을 의식적으로, 의도적으로 거부하고 자신만의 의지로 운명을 개척하려는 자, 안티구아 콘셉시온(Antigua Concepcion)! 옛 개념, 옛 관습, (멕시코의) 역사, 늙은이, 혹은 인마쿨라다 콘셉시온(Inmaculada Concepcion, 무원죄 성모의 수태)을 의미하는 추상적 개념의 실체화! 어디에 묻혀 있는지 알 수 없는 추상적이면서 구체적인 모순적인 존재. 모든 땅을 소유하고 자신의 게걸스로운 욕망을 채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과거의 역사이자 현재의 권력자! 마녀! 모든 것에 자신의 의지를 반영시킨 지상의 신! 타인의 운명은 그녀에 의해 숙명이 되도록 하는 악의 근원. 권력욕의 상징! 세대를 이어 하나의 역사가 되어버린 법칙! 안티구아 콘셉시온 그리고 …(아직 읽어보지 않은 이들을 위해 감춘다). 필연을 무시한 의지와 운명은 고통과 고뇌가 뒤따를 뿐이다. 누구에게나 말이다.

"우리는 결국 의지의 이름으로 필연에 충실했던가? 우리의 그 어처구니없는 우연의 일치가 바로 그것, 필연과 의지를 하나로 묶는 것이었단 말인가?"
(2권 207쪽)

3. 의지와 숙명

스피노자가 유대인의 뿌리를 가지고 있는 데다 교회라는 엄청난 사회의 압박 속에서 '독립'을 쟁취하고자 스스로 파문당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리고 스스로 그 어떤 교리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사고의 날개를 펼칠 수 있는 '고독'을 '선택'한 것처럼, 인간은 의지와 숙명의 끊임없는 싸움 속에서 살아야만 하는 존재임에 틀림없다. 선택을 하는 이단자가 되느냐 운명에 굴복하며 체념하느냐(숙명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타협한 것에 불과하다고 자위하며 사느냐는 그러한 의지와 숙명의 다툼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하나의 모습인 것이다. 잘린 머리는 어린 시절을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어린 시절에는 … 우리를 얽매이는 어떤 시기보다 우리는 그 시기에 보다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다. … 우리를 생존하게 하기 위해, 직업적인 삶의 리듬에 우리를 맞추기 위해, 전반적인 합의에 의해 전통적으로 전해 내려오고 우리를 받아들인 규범에 우리를 끼워 맞추기 위해 우리가 순응해야 하는 모든 연령층에서 벗어나서 살 수 있도록 허용한다 …"
(1권 96쪽)

어쩌면 우리네 '어른들'은 잘 길들여진 가축 떼 혹은 의지가 없는 인형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인생은 다 그렇고 그런거야."하며 입버릇처럼 말한 예리고, "그냥 그런 줄 알아."하며 여호수아의 의지를 묵살한 상히네스 변호사의 말을 인생의 법칙으로 여기면서 말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안전하게 있으니까!' (안전하게 있다는 표현은 제2권에서 단골손님처럼 등장한다)

미겔 아파레시도의 경우처럼 우리는 자신만의 감옥에 갇혀 끊임없이 자위하며 사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는 언제나 호랑이와 같은 눈으로

"나는 내가 원해서 이곳(감옥)에 있는 거야. 감옥이 나 자신으로부터 지켜주니까 … 내가 이해하고 나를 이해하는 세상이 이곳에 있으니까."
(1권 286쪽)

"이 안에 있다 보면 내가 아닌 나를 만들어 낼 필요도 없고,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내 모습을 꾸밀 필요도 없어. 여기서는 예절과 같은 모든 관습을 비웃어 줄 수 있거든. 여기서는 어느 계층에 속하지 않아도 되니까."
(1권 248쪽)

라고 말한다. 그러나 과연 그는 자신의 의지로 자신만의 운명을 만들었을까? 글쎄. 과거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무시무시한 숙명의 굴레에서 그의 의지의 보잘것없음이란 얼마나 극명히 드러나는가 말이다.

이처럼 우리 어른들이란 안티구아 콘셉시온, 막스 몬로이, 늙은이처럼 두려움에 벌벌 떠는 존재여서 자신이 만든 세계가 이 세상 모든 이들을 위한 세계라며 착각하며 위선적으로 살아간다. 모든 것을 의지가 아닌 숙명으로 변모시키면서 말이다. 왜냐하면 '안전하게 있으니까'.

4. 의지와 운명

무엇이 의지이고 무엇을 운명이라 부를 수 있는가?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다고 하지만 도대체 무엇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단 말인가? 설령 듣기 좋은 말로 우리에게 의지가 있으며,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설계해 나갈 수 있다손 치더라도,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더욱 거대한 힘에 의해 놀아나고 있지 않느냐 말이다. 손오공이 온갖 능력과 재주를 발휘해 가며 활약했다고 스스로 '믿고' 있었지만, 결국 그곳은 부처님 손바닥이 아니었던가! 여호수아와 예리고. 그들은 '존재'하였던가? 이 모든 것이 배후자의 손바닥 위에서 단지 놀아난 것에 불과한 것이었을까?

하지만 난 다음과 같이 위안을 삼기로 하겠다.

인간은 원형 광장이다. 원형 광장에서 뻗어 나가는 수많은 길들 중 선택하는 것은 바로 자신이다. 그것은 자신의 의지로 행하여진다(그 의지는 복합적인 개념이어서 그 안에는 사상, 감성, 감정, 지성 등의 요소가 종합적으로 담겨있다. 마치 니체처럼). 하지만 거기에는 일정한 전제조건이 따르는데, 바로 원형을 유지하기 위한 '필연'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도저히 선택할 수 없는 것들. 어차피 인생이란 자신에게 주어진 패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른 의지적 삶이다. 만약 자신의 의지대로 인생을 산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자신이 개척한 '운명'이 될 것이요, 그러하지 않다면 그건 '숙명'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은 불멸의 죽음을 맞이한 뒤에야 여실히 드러나게 될지도 모른다. 여호수아처럼 말이다.

우리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현재에는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고 있다(현재가 없으면 과거와 미래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힘'은 매순간 선택할 때마다 역사, 관습, 규범 등의 이름으로 강력하게 작용한다. 하지만 그 힘이라는 것도 바꿀 수 있는 것이다. 그 힘이 무엇인지 안다면 말이다. 여호수아와 예리고, 그리고 이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비극적이고 불쌍해 보이는 이유는 그것을 간과하고 숨기고 가면을 씌우고 속였기 때문이다. 왜 숙명이라는 감옥 안에 자신을 가두는가? 시간을 재촉하지 말고 자신의 의지대로 현재를 살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은가?
 

오늘의 책을 리뷰한 'crazyforb'님은?
꿈을 향해 발을 내딛으며 자신의 존재를 찾고자 하는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인간'. 철학, 정치, 역사, 법, 고전문학 그리고 경험을 통해 세상의 이치, 인간의 본질에 대해 사색하는 작은 '인간'. 독서를 위한 독서가 아닌 삶을 위한 독서를 하는 뼈와 살을 가진 '인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