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조한 도시> - 여백의 본성으로 기록한 도시 블로거, 책을 말하다

 

이영준 | <초조한 도시> | 안그라픽스 | 2010 


도시는 왜 초조한가? 도시의 초조함을 따라 그 발상지로 거슬러 올라가보니 '에녹'이 있었다. '에녹'은 동생을 죽이고 추방당한 카인이 '떠돌아다님'을 뜻하는 '놋'이라는 땅에 정착해 만든 성이며 자신의 아들의 이름을 따 붙인 이름이다. 마음 한구석에는 죄책감을 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환경에 대한 두려움에 쫓기며 생존을 위해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던 곳, 방랑의 운명이 각인된 땅에서 태어나 방랑자의 아들의 이름을 얻고 그 운명을 이기기 위해 문명으로 무장했던 곳, 바로 그곳이 도시의 시작이다. 따라서 도시에는 본향을 떠난 자의 한과 생존에 대한 초조함이 항상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이것은 현대 도시에도 무의식적으로 계승되어 테크놀러지와 함께 더욱 급박한 박동으로 읽혀지고 있는 것이다.

현대인의 초조한 도시를 실감나게 묘사한 예로는 갓프레이 레지오 감독의 영화 <Koyaanisqatsi(코야니스카시)>를 들 수 있다. 'Koyaanisqatsi'란 호피족 인디언의 언어로 '균형잃은 삶(Life out of balance)'을 의미하는데, 87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음울한 저음으로 반복되는 이 단어(이 영화는 대사없이 음악과 영상으로만 제작되었다)는 탐욕으로 광폭하게 발달한 거대도시에 불길한 경고음으로 작용한다. 도로에 줄지은 자동차의 물결, 초고층 빌딩들의 경쟁적인 스카이라인, 자연에 황량함을 가하는 풍력발전기들의 도열, 공장 컨베이어에 실린 규격화된 제품들, 지하철 요금기를 통과하는 기계적인 사람들의 움직임... 생활인이 아닌 관람자로서의 도시인들은 'Koyaanisqatsi'라는 음울한 주문에 최면이라도 걸린 듯 도시가 재로 붕괴되는 마지막 장면을 향해 진심으로 동의하게 된다. 어쩌면 도시를 그렇게 만들어왔던 공범자의 심리가 죄책감으로 작용했을지도...

하지만 <초조한 도시>는 똑같은 유형의 도시를 대면하면서도 보다 긍정적인 자세로 도시를 탐닉할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하고 있다. 이 방법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가리타니 고진에게서 힌트를 얻은 '괄호에 넣기'인데 이는 쉽게 말해 보기 싫고 듣기 싫은 것을 의식에서 제외하는 것을 의미한다.

미적 태도는 대상 그 자체로부터가 아니라,
그로부터 받게 되는 다양한 반응을 괄호에 넣는 것 그 자체로부터 쾌를 얻고 있다.
(17쪽)

저자가 도시에서 괄호 안에 넣고 싶은 것은 바로 일상의 '초조한' 모습들이다. 이 책의 제목이 <초조한 도시>인 것도 말 그대로 '초조한 도시'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초조한'을 괄호에 넣었을 때 드러나는 새롭고도 비일상적인 도시의 미학을 공유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괄호에 넣기'의 목적은 단순히 도시를 아름다운 풍경으로 바라보고 즐기기 위함은 아니다. 이것은 급변하는 도시에 안타까움을 가졌던 저자가 사라져가는 도시의 피사체를 사진으로 기록하기 위해 선택한 방편이며 피사체가 남기고 간 시대의 메시지를 극명하게 기리고자 하는 온정 어린 시선이다. 따라서 '기호의 제국', '밀도와 고도', '콘크리트의 격'을 따라 이어지는 이미지들의 여정은 체험을 제공하는 공간적 산책이라기 보다는 의미를 되짚어보는 시간적 산책이라고 불러야 적합할 것 같다.

- 기호의 제국
도시에는 수많은 기호들이 존재한다. 우리나라처럼 간판의 위세가 막강한 도시에서는 글씨가 곧 기호의 전부인 것처럼 간주되기 쉽지만 사실 기호라는 것은 교통 표지판처럼 그대로 읽어야 할 것부터 풍경의 맥락에 의한 상징, 은유, 모순 등 숨겨진 것에 이르기까지 도시가 가진 이야기들을 포괄하는 의미이다. 예를 들어 간판 밀집지역에서 크기나 글씨체로 드러나는 글씨의 욕망을 읽어내는 것, 교회와 증권사들의 간격을 압축해(망원렌즈로 바라봤다) '물신의 가호를 받은 종교'라는 과장어법을 적용하는 것 등은 도시의 기호를 해석하는 신선한 방식이다. 특히 급격하고도 잦은 변화를 겪는 우리의 도시에는 여러 층의 시간들이 혼재하기에 '기호의 제국'에 소개된 이미지들은 보다 풍부한 기호를 함축하며 더욱 흥미롭게 다가온다. 

- 밀도와 고도
밀도와 고도는 도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도시가 날로 확산됨에 따라 필연적으로 갖추게 되는 것이 바로 이 밀도와 고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극심한 밀도와 고도를 비집고 들어가는 인문학적 사유들은 상당히 유연했다. 특히 들뢰즈와 가타리의 '매끈한 공간과 주름진 공간', '되기(becoming)'의 의미를 의왕시 재개발 지구의 사진 한 장을 통해 명쾌하게 설명한 부분은 가장 돋보이는 인문학적 해석이였다. 이밖에도 저자는 고딕의 욕망을 초월한 현대 건물의 고도, 교통량의 수평적 밀도에 의해 퇴색되가는 랜드마크로서의 자연의 고도, '삭막미'라는 경지로 승화된 철골의 밀도와 리듬 등 다양한 풍경을 통해 일반적으로는 포착하기 힘든 거대한 스케일을 독특한 생각들과 함께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 콘크리트의 격
적어도 일본의 유명한 건축가 안도 타다오가 노출 콘크리트 건물을 디자인하기 전까지 콘크리트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싸고, 거칠며, 삭막한' 도시의 재료였다. 아름다움 보다는 기능과 공법에 충실한 고가도로나 질식할만큼 천편일률적인 아파트가 눈에 띄게 많은 탓일 것이다. 그러나 사진 속의 콘크리트는 격을 가진다. 콘크리트를 도시의 옷이라 생각했을 때 기존에 자리잡은 이미지가 길거리표 옷이였다면 책 속에서 제시하는 이미지는 명품 브랜드라고 표현하면 적당할까? 마치 신전을 떠받치듯 우아한 고가도로의 기둥들과 도로 곡선을 따라 살포시 하강하는 자동차 한대, 80년대 군사시설의 향수(?)가 어린 아파트 벽면, 콘크리트의 힘과 질감, 빛을 통한 아름다움...너무 흔해 쉽게 지나치기 쉬운 장면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한 관찰력과 콘크리트를 가장 돋보이게 하는 빛을 포착한 솜씨가 대단하다. 

<초조한 도시>는 모든 도시에 여백이 존재함을 전제로 한다. 이것은 서울과 같은 거대도시, 밀집도시라 해도 예외는 아니다. 그 까닭은, 인간에게는 누구나 일종의 숨구멍을 찾으려는 본성이 내재되어 있고, 거대 공간의 밀도가 높아질수록 숨구멍의 밀도도 높아진다는 긍정적 논리가 아직 살아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저자의 작업을 지탱해주는 신념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획일적이고 빽빽한 아파트촌에서도 다양성의 모습을 찾아내는 것, 혼란스럽고 아찔한 변전소에서도 복잡계의 체계를 발견하는 것에는 긍정적인 온기가 따른다. 비록 수천년 전부터 물려받은 생존에의 두려움이 언제나 요동친다 할지라도 도시에 대한 희망이 남아있다면 용감하게 초조함을 괄호속에 넣어버리는 시도가 우리에게도 필요할 것이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이향*'님은?
어느날 문득 얄팍한 지성과 감성으로 잘 팔리는 것을 만드는 일에 지쳐버렸다. 그래서 자동차 엔진을 튜닝하듯 책장 내부를 교체하고 책을 읽어나가기 시작한다. 이향(異向)…다른 방향을 가는 데는 두터운 힘이 필요하다. 이제는 좀 더 두텁게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