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들의 결탁> - 우리 모두의 파라다이스 핫도그 블로거, 책을 말하다

 

존 케네디 툴 | <바보들의 결탁> | 도마뱀출판사 | 2010

태어난 건 의지가 아니었고, 살아야 하기에 사는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게 현실이었다. 어제는 이렇게 하는 게 옳다더니 오늘은 저렇게 해야 한다고 했다. 내 안에는 욕심이 없는데, 그걸 불어넣는 건 늘 바깥의 무언가였다. 정체모를 압박에 종종 숨막혔지만 패배자가 되지 않으려면 무언가를 해야 했다. 죽을 수는 없었다. 무언가를 하기만 하면 괜찮을 줄 알았다. 하기만 하면 될 줄 알았는데 살다보니 반드시 무언가가 되기도 해야 했다. 그래야 대접을 받고, 대접받는 게 성공이며, 성공해야 잘 사는 거라는 걸 자연스럽게 학습했기 때문이다. 더 먼 훗날 내가 생각하는 성공은 선택받은 사람에게나 주어지는 행운이란 걸 알았고, 나는 바보였다는 걸 깨달았다.

주인공 이그네이셔스도 알았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칭찬을, 어떻게 하면 비난을 듣는지를. 학벌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질 리 없고, 읽고 쓰는 수준에 있어 천재적 소양을 자랑하는 그가 몰랐을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괴짜로 불리는 바보가 되었다. 어째서? 똑같은 세상에 사는데 어느 누가 어떤 근거로 누군가를 '바보'라 부를 수 있나. 그럼 누가 '바보'고 또 누가 '바보'가 아닌가. 그것만으로도 이미 머리가 지끈거렸는데 이 우스꽝스럽고 독특한 소설을 읽어내려면 이그네이셔스에게 빙의해야 했다. 코드 안 맞는 미국식 유머에 오롯이 녹아들 순 없어도 그가 어떻게 제도권에 반기를 들고 있는지, 궁극적으로 그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하지만 세상이 어째서 바뀌지 않을 수밖에 없는지 알았기에 설령 깔깔거리게 만드는 장면을 만난다 해도 시원하게 웃어제끼지 못했다. 이그네이셔스를 포함한 '바보'들의 삶은 우리네 그리고 내 삶이기도 했기에. 내게 이 소설은 웃고 나면 허무감이, 그 허무감과 동시에 비애가 찾아드는, 웃음과 눈물의 궁극적 지점에 살포시 얹혀있는 작품이었다.

1960년대 초, 뉴올리언스. 옮긴이에 의하면 허리케인 카트리나의 비극과 재즈의 도시로 알려졌고, 미국의 그 어떤 도시와도 다른 특유의 매혹적이면서도 불길한 문화와 분위기를 풍기는 곳. 심지어 번역으로 불가능한 사투리성 억양까지 가지고 있다는 등장인물들의 -흑인 공장노동자들과 동성애자들, 흑인 부랑자와 스트리퍼- 대화를 듣자면 남일 같지 않아 읽기를 멈추게 된다. 뻔히 알지만 반드시 눈으로 확인하고 싶지 않은 어떤 일들처럼 여겨져 다시 책을 미뤄놓게 되는데, 한동안 멀리해도 그 도피로 인한 자괴감이 없어지지 않기에 가슴이 답답해져 다시 읽곤 했다.

'파라다이스 핫도그' 노점상이 없었더라면 난 이 이야기를 그저 그들의 이야기라 치부하고 던져버릴 수 있었을까. 꿈꾸고 싶어 쌓아온 내 20대에게 덜 미안할 수 있을만큼의 뻔뻔함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차라리 외면하고 바보처럼 주어진 생을 사는 것이 행복이란 걸 쭉 믿을 수 있었을까. 만약 '파라다이스 핫도그' 노점상에서 이그네이셔스가 먹고 튀려 한 노릇하고 뜨끈하고 굵직한 핫도그를 하나만 먹을 수 있었다면 덜 쓸쓸했을까.
어쨌든 그 마음은 이 책을 계속 읽도록 부추겼고, 알지 못하는 시대의 뉴올리언스를 떠올리는 데 큰 영감을 주었다. 여기 나오는 다양한 인간군상은 미국이기에 가능하지만 우리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다. 밑바닥 삶이라 불러도 좋을 이들이 이뤄낸 단 한 번의 결탁은 그저 작은 소동으로 마무리 되지만 희망을 갖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작은 소동이 큰 회오리 바람이 될 수 있는 날이 반드시 올 거라는. 

세상이 규정한 평균에서 좀 다르다 해서 괴짜로 규정짓는 우리네 사고방식에 반기를 든다. 아마도 평균을 규정짓는 기준이 꽤, 엄청, 대단히 많이 틀려먹었으리란 생각. 옆집 따라 영어학원, 앞집 따라 미술학원, 뒷집 따라 대기업을 부르짖는 우리네 현실이 우리가 바보가 되지 않기 위한 평균치의 기준잣대란 말일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럴 리도 없다. 우리가 말하는 '바보'는 그저 만들어놓은 현실에 규격화되지 못하는 인간을 지칭하는 수준 떨어지는 언어에 지나지 않을 지도.

뚱뚱하고 제멋대로고, 예의도 없을 뿐더러 자기 어머니께도 막 대하는 막무가내 이그네이셔스지만 미워할 수만도 없었다. 어머니를 막 대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 없을텐데 정작 주변을 둘러보면 어머니를 정중하게 대하고 효도하는 자식이 더 괴짜 같이 느껴진다. 이 무슨 뼛속 깊이 틀어진 뻔뻔한 인간들의 되지도 않는 입놀림이란 말인가. 이제는 조금 알겠다. 어느 시대든 세상을 바꾸어온 것은 한 명의 괴짜 아니, 소수의 바보들이었다. 물론 여기서 바보가 무기인 걸 아는 이들이 흉내내는 바보는 당연히 제외되어야 한다. 어느새 바보가 무기가 되기도 하는 세상에 산다. 모두가 무언가를 바꾸고 싶어하는 듯 보이지만 정작 현실은 그 반대다. 바보 아닌 이들은 변하는 것도, 포기하는 것도, 그렇다고 더 가질 기회도 모조리 포기한다. 갖든 갖지 않든 대놓고 달려들 수 있는 이들 역시 가진 것 없는, 잃을 것 없는 바보들이다. '바보'들의 '결탁'은 그래서 의미있는 것이다.

의외로 세상을 바꾸는 것은 아주 작고 사소한 변화들이다. 작고 사소한 것이 얼마나 반복적으로 지속되어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그네이셔스처럼 변하지 않을 줄 아는 바보와 대부분의 우리처럼 바라만 보는 바보는 꽤 다를 것이다. 뻔뻔하고 극악무도한 이그네이셔스에게 점점 동화되어 가면서 느낀 생각인데, 순간순간 그래도 나보다 그가 낫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구원도 재앙을 일으킬 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나 주어지는 것 같다. 일을 저지르는 것도 해결할 능력 만큼이나 값진 것이다. 아무 것도 못하고 그저 해야 하는데만 외치는 사람에 비하면.

비가 내리고, 지상의 먼지를 쓸어간다. 세상에 바보들이 많아지면, 바보 아닌 사람이 오히려 바보들 속에 흡수될 수 있다. 그것이 순리고 진실이다. 한계라면 우린 소설 속 이그네이셔스가 죽어도 될 수 없다는 것 뿐. 지상에 발딪고 사는 누구도 자신이 속한 공동체 즉 체제 안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건 앞서 말한 자신감과 능력, 순리 같은 것과는 다른 문제이기도 하다. 소설을 읽고 그 주인공이 맘에 든다 해서 따라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더군다나 이그네이셔스의 시대는 1960년대, 배경은 미국 뉴올리언스다. 그런데 그게 우리가 조금이나마 위안삼고 도피할 만한 근거가 될까, 과연. 

p.s. 멋진 코믹 풍자로 사회비평에 성공했다는 평을 들으며, 자살한 아들 대신 노력한 어머니 덕으로 우여곡절 끝에 출간될 수 있었던 작품 같은데 이토록 대단한 평가라면 아쉬울 만 하다. 어째서 천재는 늘 일찍 보내고 늦게 발견되는 걸까.

오늘의 책을 리뷰한 ‘감성소녀’님은?
아직 20대인 것이 희망. 자칭 예술애호가. 어느 날 문득 알게 되었다. 몰입과 지속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단 것을. 규격적 인간을 선호하는 세상을 거스르며 살고 싶어 책읽기를 선택했다. 로마 스페인광장에서 하루 종일 사람구경하며 책 읽는 삶을 꿈꾸지만 여의치 않은 현실에 로마로 떠나는 사람들의 여권에 도장 찍어주는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