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어놓은 구절들] 김이설, 나쁜 피 접어놓은 구절들

 

김이설 | <나쁜 피> | 민음사 | 2009 

나는 도착지에서 보내는 시간보다 목적지로 향하는 시간이 더 좋았다. 내가 사는 곳이 지긋지긋해 도망치듯 버스에 올랐지만 어디든지 내가 사는 곳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쉽게 깨달았다. 터미널, 앞의 시장 통, 여관 골목, 앞만 보고 걷는 사람들, 남, 녀, 노, 소, 그들이 떠드는 소리, 전화기 부스에 줄 서 사연을 읊는 사람들, 연인들, 양아치들, 착한 사람들과 아닌 사람들이 뒤엉켜 구분되지 않는 곳. 그건 어디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종착지는 나에게 의미가 없었다. 그저 벗어난다는 의미, 그리고 다시 돌아오는 시간이 필요했다. (68쪽)

누구에게나 일상의 자리가 있기 마련이다. 어제와 오늘, 내일 사이에 어떤 연속성이 존재하는 공간. 크나큰 변화 없이 같거나 비슷한 행위들이 시간을 채우는 그곳. 날마다 반복되는 생활, 그 속에 나를 설명하는 삶의 양식이 있고, 내 삶을 지배하는 현실이 있다.

그러므로 가끔, 누군가는 자주, 그 일상적 공간을 벗어나기 위해 여행길에 오른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다. ‘내가 사는 곳이 지긋지긋해 도망치듯 여행길에 올랐지만 어디든지 내가 사는 곳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내가 어디에 가든 나는 그대로이고, ‘내가 사는 곳’ 또한 거기 그대로이니, 돌아오기 위한 여행은 그저 ‘벗어난다는 의미’만 제공할 뿐, 그 이상일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날엔가 다시 여행을 생각하게 됨은 출발지와 도착지 사이, 떠나고 돌아오는 그 유예된 시·공간에서만, ‘곳’을 근거로 한 일상에서의 일탈이 허락될 수 있는 이유이다.  

-컨텐츠팀 에디터 현선(anejsgkrp@bandinlun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