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의 고군분투 생활기> - 나의 일레븐, 붕괴된 것은? 블로거, 책을 말하다



 

제스 월터 | <시인들의 고군분투 생활기> | 바다출판사 | 2011

 

언론인 출신 미국 작가 제스 월터의 <시인들의 고군분투 생활기(The Financial Lives of Poets)>는 제목 그대로 구차하고 구구절절한 소설이다. 저명한 타임지의 간택을 받은 데에는 당연히 작품 자체의 완성도도 어느 정도 기여했겠지만, 무엇보다도 책이 보여주는 세계에 대한 시의성이 크게 한 몫 했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애초에 'financial'이라는 단어가 소설 제목에 흔히 쓰이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소설은 서브프라임 사태로 인해 몰락해가는 미국의 한 중산층 가정의 모습을 추적한다.
집이 넘어가기 직전 일주일이라는 시간 동안 가족들 몰래 집을 지켜내려는 가장의 애환이 르포르타주만큼이나 생생하게 전해진다. 빚과 실직이라는 중대한 경제적 문제에 맞닥뜨린 주인공에게 설상가상으로 부모, 아내, 자식에 이르는 집안의 갖가지 우환마저 겹쳤으니 이쯤 되면 보통 사람으로선 견뎌낼 재간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 책의 주인공 맷은 이 모든 사태를 방기하지 않고 홀로 고군분투 한다. 빚을 유예하기 위해 매일같이 전화 다이얼을 돌리고 취업을 위해 굴욕적인 연봉을 놓고 협상하기도 한다. 치매에 걸린 늙은 아버지를 데리고 병원을 찾는 일, 아내가 만나고 있는 것으로 의심되는 남자를 찾아가 염탐하는 일, 학교 폭력 사건에 연루된 아이들의 학교를 찾아가는 일에도 소홀함이 없다. 경제적인 몰락에서 시작된 위기로부터 가정을 지켜내려는 가장의 눈물겨운 사투는 그야말로 처절하다. 그러나 절절한 사연들이 쏟아지는 와중에도 소설은 신파스러운 접근법을 지양하고 있다. 주인공 맷은 생활의 고단함을 한탄하며 토로하는 대신 실소 나는 유머로 절박함을 완충한다. 


<시인들의 고군분투 생활기>는 다양한 상황적 아이러니를 그려내며 물질적인 문제와 정신적인 문제의 간극을 보여주는 데 주력한다. 애초 '시인들'이 '생활'을 위해 고군분투 한다는 제목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이 경제적 몰락이 궁극적으로 다다르는 곳은 정신적인 황폐다. 금융과 시라는 태생적으로 어울리지 않는 아이템의 조합이라는 기괴한 발상으로 창업을 시작한 맷에게 그때부터 몰락은 예견되어 있었던 것인지 모른다. 자기 밥그릇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자가 금융 자문 관련 창업을 하려 했다는 아이러니도 문제이건만, 몰락의 수순을 밟아가는 과정에서도 그 '시적' 태도를 여전히 버리지 못해 구차한 현실을 시적 재료로 삼는다. 시인 오규원의 생각을 빌리자면 800원 밖에 나가지 않는 '프란츠 카프카' 한 잔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황이 심각해질수록 정신과 물질의 간극은 커질 수밖에 없다. 그 간격만큼이나 추락하는 높이는 늘어난다. 


경제적인 몰락이 심각한 것은 정신적인 순수성을 너무 쉽사리 앗아간다는 것에 있다. 가족 관계에서의 소원함도 마리화나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는 나약한 정신도 모두 경제적 몰락과 함께 찾아온다. 심지어 위기는 도덕성에 흠집을 내는 그럴싸한 구실마저 제공해 준다. 막다른 곳에 몰린 맷이 '잡초사업(?)'이란 타락의 길로 발을 들여 놓는 것도 당연한 수순으로 보인다. 생활고로 인해 벌어진 일련의 행위들을 범죄로 치부하기는 그렇지만 어떤 절박함도 도덕적인 면죄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면 분명 그의 '타락'이 맞다.


4리터에 9달러나 하는 우유를 파는 타락한 자본주의의 상징 '세븐일레븐'은 그 이름으로 인해 자연스레 '나인 일레븐(9.11)을 연상시킨다. 전 세계를 정신적 공황으로 몰아넣었던 '나인 일레븐(9.11)'은 이미 참담할 지경에 이른 주인공의 처지에 대한 은유이자 미국 사회가 봉착한 위기에 대한 상징이다. 겉잡을 수 없는 추락이 비단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고 단 한 사람의 특수한 사례도 아닌 이상 범세계적인 위기라 해도 좋을 것이다. 이 소설은 구체적인 미국의 사회상에 대한 묘사가 돋보임에도 문화적 차이를 뛰어넘는 보편적인 문제의식을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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