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로 물드는 오후] 틈, 손현숙 詩로 물드는 오후

 

손현숙 | <손> | 문학세계사 | 2001 



몇 날 며칠 통증을 앓게 하는
내 삶의 가장 안쪽을 불안하게 비집는

한번도 불러들인 적 없는데
저 스스로 와서
한 아가리, 크게 나를 삼키고 싶어 하는

새벽마다 두통을 몰고 와
내 속을 거뜬하게 두드려 부수기도 하는

때로는 밤의 강 유유히 건너와서
머리에서 발끝까지 피 말리며 하얗게 움켜쥐는

누구냐?

느닷없이 쾅! 쾅!
내 가슴에 머리를 들이받고 무작정
못을 치는 

-손현숙, <손>, 문학세계사, 2011, 66쪽

대체로 괜찮은 삶을 산다. 사람들 사이에서, 웃는 낯으로, 유쾌한 언동을 하며, 하하 호호. 고민이야 누구에게나 있는 법이고,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그게 또 고민이 아닐 수도 있을 테니, 이만하면 제법 살만 하지 않은가, 생각하며 사는 것이다.  

그러다 어떤 날, 틈을 만나게 된다. 아니, 빠져들게 된다. 그런 날, 대체로 괜찮던 삶은 뒤엎어지고, 나는, 생의 진창으로, 갈 곳 없는 나락으로 가혹하게 밀쳐진다. 깊이를 알 수 없는 틈으로, 이제까지의 모든 삶을 짊어지고 그만큼의 무게를 지닌 육체 그대로, 밑으로, 밑으로만 아찔하게 떨어져 내리는 것이다. 

그렇게 낙하하는 동안 생각한다. 그 틈의 가장 밑바닥에서 나를 붙들어 내동댕이치려는 너,  “내 삶의 가장 안쪽을 불안하게 비집”고, “내 속을 거뜬하게 두드려 부수기도 하”며, “머리에서 발끝까지 피 말리며 하얗게 움켜쥐는” “느닷없이 쾅! 쾅! 내 가슴에 머리를 들이받고 무작정 못을 치는” 너. 

넌, 누구냐?

바닥에 아프게 떨어진 후에야 답을 찾는다. 그곳에 있던 게 바로, 내가 아는, 가장 못나고, 어리석고, 나약한 내 자신이라는 걸. 지워지지 않는 기억, 아물지 않는 상처의 틈을 그악스럽게 벌려 기어이 피를 보고 마는 게 또 나라는 걸. 이런.
 

-컨텐츠팀 에디터 현선(anejsgkrp@bandinlun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