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로 물드는 오후] 이장욱, 가을에 만나요 詩로 물드는 오후

 

이장욱 | <정오의 희망곡> | 문학과지성사 | 2006

 

가을에 만나요

 

오늘은 인형처럼 걸어다녔다
광화문에서는 관절이 부드럽게 회전하였다
종로에서는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나의 완성을 모두가 용서하였다
견고한 삶이 시작되자
나는 무한히 순결하였다
벌거벗는 것은 좋아
매우 아름다운 것도 좋지
나는 남의 사생활을 금방 잊을 수 있다
나는 어떤 편향도 없다
무슨 말인가 흘러나오려는 순간에
조용히 멈출 수 있다
사랑을 위해 옷을 갈아입었지만
혜화동의 가을은 정기적으로 흘러가고
생각은 플라스틱처럼 휘어졌다
네거리에서 좌회전하여 편의점이 보이자
나는 정지하여 당신을 기다렸다
드디어 당신의 미소를 느끼며
나는 전진하였다
당신을 향해
한 발 한 발

 

사람들이 모두 옷을 갈아입었다. 이제 반팔 차림을 보는 일이 드물다. 눈부신 초록을 뽐내던 나무들도 가을을 온몸에 끼얹은 듯 노랗게, 붉게 변해간다. 시끌벅적하게 생명력을 자랑하던 것들은 소리를 잃고 겸손해진다. 가을, 가을은 참 좋은 계절이다. 더위도 추위도 느끼지 않으며 지그시 등을 미는 바람의 힘으로 이곳 저곳으로 걸음을 옮길 수 있으니. 가을의 바람은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쉽게 저 멀리로 나아가게 한다. 맵싸한 냄새가 풍기는 가을 바람 앞에서 마음은 더없이 낭창낭창하게 흔들리고, 시시각각 얼굴을 바꾼다. 그러니까, 이런 때에 당신을 만나면 좋겠다. 나의 완성을 모두가 용서할 수 있는 지금에. 그러면 별볼일 없던 나의 시간들이 견고한 삶이 되어줄 테니까. 나는 어디에서든 정지하여 당신을 기다리겠다. 기다리고 기다리다, 드디어 당신의 미소를 느끼며 당신에게 한 발 한 발 전진하겠다. 그러니 우리, 가을에 만나요.

 

- 컨텐츠팀 에디터 료(fololy@bandinlun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