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의 맛] 손보미, <폭우> 단편소설의 맛

 

책을 읽고 나면 머릿속에 박히는 것이 있습니다. 김훈의 <칼의 노래>에서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와 같은 첫 문장이 그렇습니다. 이야기의 시작인 동시에 폐허가 된 땅을 암시하지요. 마음 깊이 가라앉는 것도 있습니다. 황정은의 <百의 그림자>에서 ‘노래할까요.’와 같은 마지막 문장이 그렇습니다. 이야기의 끝인 동시에 동시대의 연인에게 보내는 작은 기원 같습니다. 이렇듯 문장이 남긴 인상을, 저는 ‘맛’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비단 장편소설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앞으로 문예지와 기타 매체에 갓 게재된 단편소설을 함께 읽어 보려고 합니다. 문장의 ‘맛’과, 그것을 요리한 작가들을 소개하겠습니다.

첫 번째로 소개할 작품은 손보미의 폭우입니다. 먼저 ‘맛’을 잠깐 볼까요?
 

그녀의 남편은 전자제품 상점의 판매원이었는데, 어느 날 손님이 없는 매장을 어슬렁거리다가 갑자기 넘어졌다. (324쪽)

미스터 장은 인스턴트커피를 한 모금 마셨고, 자신이 누리고 있는 이 평안한 삶에 감사했다. (344쪽)

 
폭우의 처음과 마지막 문장입니다. ‘그녀’와 ‘남편’의 이야기에서 시작해 ‘미스터 장’의 이야기로 끝나는 대목에서 예상할 수 있듯이, 폭우에서는 각기 다른 인물의 이야기들이 동시에 전개됩니다. 일견 관계없는 그들이지만 결핍된 데가 있다는 점에서 맞닿아 있기도 합니다. 폭우에 시야가 가려진 듯 곁에 있는 이들과 소통하지 못하는 인물들이지요. 안타까운 상황이지만 손보미의 문장은 이들에게 거리를 둡니다. 호흡이 길고, 사이사이에 쉼표가 등장합니다. 어찌 보면 감정이 제거된 듯도 보입니다. 하지만 오히려 저는 감정을 비워둔 그 자리에 스스로를 이입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야 해.’라기보다는 ‘그냥 이런 게 있어.’라며, 결핍의 단면을 덤덤하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손보미는 미국 소설을 통해 문학을 접했고, 평소 전기문을 즐겨 읽는다고 합니다. 살아온 이야기들을 접하는 것이 흥미롭고, 누군가가 자신의 소설을 읽어주었을 때 그런 느낌을 받았으면 한다고요. 소설을 쓸 때는 등장인물의 말과 행동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답니다. 등장인물이 되기보다는 주변을 맴돌며 찬찬히 지켜본다는 뜻이겠지요. 폭우를 이루는 문장의 기원을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해를 위한 거리 두기. 일상 속에서도 때때로 필요한 태도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 컨텐츠팀 에디터 희진 (hebong2000@bandinlun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