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의 시》 - 아무도 듣지 않는 장송곡 책, check, 책


당신은 서울로 주소를 옮긴다. 타향살이를 시작하면 보통 첫 번째로 하는 일이다. 그로써 서류상 시민임을 인증한다. 두 번째로는 먹고 자는 곳에 필요한 물건을 채운다. 낡고 텅 빈 공간이 집의 꼴을 갖추면 조금은 실감한다. 서울에서의 삶이 직접적으로 와 닿는 순간이다. 일터나 학교로 향하는 일은 세 번째다. 이것은 애초에 고향을 떠난 목적이기도 하다. 삼 단계를 완수하고 나면 나는 이곳에 산다! 하고 생각할 수 있다. 아직은 이르다. 네 번째가 남아 있다. 바로 무시(無視)에 능숙해지는 것이다. 창녀, 불법체류자, 노숙자, 철거민, 마약중독자, 고아를 볼 수도 있다. 낯선 목소리가 들릴 수도 있다. 무시가 불가능하지 않느냐고? 아니다. 이 도시를 이루는 배경의 일부라고 생각해라. ‘교회’나 ‘고시원’이나 ‘김밥천국’처럼.

  시에서 가장 부유한 구역에는 신기하게도 교회가 많았다.
  시에서 가장 부유한 구역에서 신기하게도 고시원이 많았다.
  시에서 가장 부유한 구역에는 신기하게도 김밥천국이 많았다.
  무엇보다 신기하게도 시에서 가장 부유한 구역에는 시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니까 제니와 리가 시에서 가장 부유한 구역에 살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151쪽)

아버지가 섹스 클럽에 팔아넘긴 조선족 ‘제니’와 영국에서 온 불법체류자 ‘리’는 서울에서 알게 된다. 이들은 합법적인 시민이 아니다. 서울에 살지만, 자신을 무엇으로도 증명할 수 없는 존재들의 만남이다. 《테러의 시》에서 김사과는 이러한 삶을 전면에 끄집어낸다. 당신은 생각할지도 모른다. 작가라서 역시 인간을 가여워 할 줄 아는군. 멀찌감치 서서 손수건으로 눈가를 적시는 모습을 상상하는가? 그런 휴머니즘은 접어두시라. 김사과의 동력은 일순간의 연민이 아니다.

  274페이지. 제니는 중얼거린다. 274페이지를 펼쳐라.
  중얼거리며 제니는 274페이지를 펼친다.
  거기 커다랗게 ‘휴머니즘’이라고 쓰여 있다.
  그렇다, 휴머니즘.
  휴머니즘, 제니는 중얼거리며 걷는다. 타오르는 작은 불길이 가까워진다. 제니가 그 불길을 향해 손을 뻗는다. 그러나 그것은 탁자로 변한다. 돌아보면 그곳은 리의 집, 탁자 앞에 제니가 서 있다. 제니는 잠깐 망설인 뒤 비틀거리며 부엌을 향해 걷는다.
  도착한 부엌은 놀랍게도 휴머니즘으로 가득 차 있다.
  천장도, 바닥도, 싱크대도, 프라이팬도, 프라이팬 속에서 썩어 가고 있는 스파게티 또한 휴머니즘으로 충만하다. 제니가 썩은 스파게티를 한입 가득 넣고 씹는다. 이것이 바로 휴머니즘이다. 휴머니즘의 맛. 휴머니즘 그 자체. 휴머니즘의 핵심.
  그것은 몹시 역겹다.
  쓰다. 썩은 냄새가 난다. 정말이지 구역질이 난다. (110쪽)

무시 운운한 이유가 있다. 나는 당신이 불편하기를 바랐다. 분노를 깨우고 싶었다. ‘제니’와 같은 이들을 무시 혹은 직시하는 것, 어느 쪽이든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당신처럼 서울에 사는 사람이고, 당신은 그들처럼 타향에서 온 사람이다. 우리는 서로를 수식할 정도로 가까우나 무시(無視)로 일관할 만큼 멀다. 이 거리감은 무엇의 부재인가? 소설은 분노라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작가의 동력이다. 연민은 타자와의 격차에서 비롯된다. 자신이 더 나은 처지에 있다는 의식에서 이 감정은 쉽게 완성된다. 하지만 분노는 동일성에서 터져 나온다. 타자가 두들겨 맞으면 자신이 당한 것과 같다. 서울은 이러한 폭력으로 잘 세공된 휴머니즘이다. “한결같은 표정으로 그곳에 있는”(205쪽) 도시는 썩어 가는 스파게티와 다를 바 없다. 《테러의 시》는 이 악취 속에서 죽어가는 이들의 목소리를 조명한다.

장송곡이 들리거나 말거나, 당신은 주소를 옮기고 생필품이나 사들이면서 안도하고 있다. 다시, 네 번째 단계만을 남겨 두었다. 무엇을 할 것인가. 김사과는 이와 비슷한 제목의 글을 썼다. 젊은 시나리오 작가가 사망했던 작년 1월이었다.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며 “우리들이 예술가이기 전에 인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자. 예술가는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게 다른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동등하게 다르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자.”라고 말했다. 이 문장을 조금 빌려도 좋겠다. 우리들이 시민(市民)이기 전에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당신의 분노는 그 증거다.
 

- 컨텐츠팀 에디터 희진 (hebong2000@bandinlun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