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뭐 읽니?] 중앙북스 편집부, 《문예중앙 2011 여름 126》 요즘 뭐 읽니?



 
중앙북스 편집부 | 《문예중앙 2011 여름 126》 | 중앙북스 | 2011


조선후기 재자가인소설과 통속적 한문소설, 결혼기계들, 시간과 타자, 동화처럼, 아마도 아프리카, 젊은 시인들의 상상세계/말들의 풍경, 둔스 스코투스의 삶과 사상, 중력과 은총, 사랑과 교육, 사랑의 단상, 숨겨진 우주, 오늘 아침 단어, 라캉 읽기, 라캉의 주체, 책의 우주, 풀이 눕는다, 보들레르의 작품에 나타난 제2제정기의 파리, 장국영이 죽었다고,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 니코마코스 윤리학, 百의 그림자, 비평의 우울, 가나, 사랑의 단상,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열정으로서의 사랑, 이별의 능력, 사랑 예찬, 아픈 천국, 문학으로 보는 성, 마르크스 엥겔스 선집 1권, 침이 고인다, 사유의 악보, 소설의 기술, 무정, 법철학……

고작 한 문단으로도 현기증이 날 만큼 방대한 양이지요. 이 많은 책들을 한 편의 글에 소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평론가입니다. 벌써 하품 소리가 들리네요. 책 뒤에 따라붙는 고루한 해설? 독설과 논쟁의 진원지? 어려운 작품만 추켜세우는 교수? 이렇게 생각하는 이들도 있겠고요. 평론가가 모든 대중에게 사랑 받는 지식인은 아닌 듯합니다. 저는 묻고 싶어집니다. (못하면 욕먹고 잘해도 티 안 나는) 이런 일을 왜 합니까? 그들은 아마도 이렇게 대답할 것 같습니다. 음악평론가라면 음악을, 영화평론가라면 영화를, 문학평론가라면 문학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나만 알고 싶다. 혹은 모두에게 알려주고 싶다. 사랑에는 이와 같이 두 가지 마음이 공존한다고 봅니다. 특히 후자는 매개가 필요합니다. 이때 평론가는 글쓰기를 선택합니다. 자신의 사랑을 선언하는 것이지요. 비평의 권력화나 현실과의 괴리는 그들이 경계해야 마땅한 부분이겠으나, 초심만은 순애보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마침 몇몇 평론가가 사랑을 주제로 쓴 글을 읽고 있습니다. ‘성난 얼굴로 사랑하라’라는 주제 아래 《문예중앙 2011 여름 126》에서 특집 비평으로 다루어진 것들입니다. 허윤진, 권혁웅, 강동호, 백지은, 박원익이 참여하여 사랑을 말합니다. 첫 문단은 이들이 인용하는 텍스트를 나열한 것입니다. 이 시대 한국 사회의 사랑과 연애, 그 풍경을 그려낸 소설과 시, 이들 작품을 사랑하는 평론가의 이야기를 한꺼번에 접할 수 있습니다. 사실 ‘성난 얼굴로 사랑하라’의 관점을 전부 소화하지는 못합니다. (그들이 소화한 것이니까요!) 다만 저 현기증 나는 책들을 읽고 싶어집니다. 통틀어 백여 쪽에 달하는 글 중에서도 일부만을 발췌해 봅니다. 사랑의 메신저들을 만나 보시지요.
 

나는 『아마도 아프리카』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 중 한 편일 「미리케의 노우트」를 홀로 읽는다, 아니 (다시) 쓴다. 나와 그대는 각자의 운명에 갇혀 있다. 내가 살아가는 세계가 이율배반적인 것만큼이나 나 역시 이율배반적이어서, 나는 나의 말을 배반하며 살아간다. 내가 나를 부정하고 그대가 그대를 부정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운명, 파두(Fado). 나에게 육박해 들어오는 매력적인 타인들은 무수히 많지만 내가 처한 난국은 그대가 대체 불가능한 존재라는 사실.
 

허윤진, <해빙>


새로운 것은 이러한 사랑이황정은의 대화 양식과 결합하는 순간 두 연인의 서로에 대한 개방이 어떤 본원적인 수준의 나눔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고백 뒤에 무심하게 던진 “계란 먹을래요?”라는 말처럼, 이 나눔은 매우 미약하지만 그래도 어딘가 근본적인 느낌을 준다. 대체, 무엇을 나누는가? 다시 반복하거니와 대화를, 서로의 언어를 나누고 있는 중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화를 나누다’라는 한국어 문장은 절묘한 데가 있다. 나눌 수 없는 것(언어)을 나누고 있기 때문이다.
 

강동호, <사랑의 영도(零度), 만짐의 현상학>


우리는 실연한 남녀에게 ‘다른 상대는 얼마든지 있어’라고 위로하는 걸 심심찮게 볼 수 있다. (…) 그러나 실연이 그들에게 고통스러운 건 단순히 각자에게 필요한 파트너가 결여되었다는 사실에 있는 게 아니라, 그들이 파트너와의 예기치 못한 만남 속에 일별했던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이 돌이킬 수 없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 우리가 실연한 이에게 천박한 위로를 건네지 않기 위해서라면 사무엘 베케트 식으로 대응해야 한다. “실패하라, 그리고 더 잘 실패하라.” 실패에 대한 보상은 없으며, 우리는 다른 실패를 감수하고자 하는 행위 외에는 다른 방법으로 고통에서 벗어날 길은 없다.
 

박원익, <20대의 연애와 사랑, 혹은 그것을 둘러싼 소문들을 넘어서>

 

- 컨텐츠팀 에디터 희진 (hebong2000@bandinlun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