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뭐 읽니?] 박범신, ≪은교≫ 요즘 뭐 읽니?


박범신 | ≪은교≫ | 문학동네 | 2010  


소설은 이적요 시인이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노트에서 시작한다. 

“아, 나는 한은교를 사랑했다.”
“서지우를 내가 죽였다.” 

삶의 끝자락에 깊이 박힌 두 개의 사건, 사랑과 살인. ≪은교≫는 이 두 가지에 관한 고백 혹은 자백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순아홉 살의 늙은 노인이 이제 겨우 열일곱 살이 된 소녀를 사랑했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자신의 노년을 살뜰하게 보살펴준 젊은 제자를 살해하기까지? 독자는 당황한다. 소설 속에서 그의 노트를 대신 읽어주는 변호사 Q가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그 누구보다 당황했던 건 다름 아닌 이적요 시인 당사자. 노년에 다다른 생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은 욕망은 강렬했고, 그 덕에 그가 살아온 긴 세월의 날들은 그저 헛수고에 지나지 않게 돼버렸으니. 그러니까 이적요 시인의 사랑과 살인 앞에 놓인 왜?와 어떻게?라는 물음은, 독자 이전에 이적요 시인 스스로에게 주어진 것이다. ‘은교를 만나고 세상이 무너져버린’ 노시인이 죽음 직전에 삶을 정리하며 남길 수 있는 마지막 언어란 결국, 그렇게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스스로를 스스로에게 먼저 설명해주는 것이었을 테니.   



“한 소녀가 데크의 의자에 앉은 채 잠들어 있었다. 

(…) 등나무로 엮어 만든 내 흔들의자에 소녀가 아무렇지 않게 놓여져 있다. ‘놓여져’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 열대엿 살이나 됐을까. 명털이 뽀시시한 소녀였다. 턱 언저리부터 허리께까지, 하오의 햇빛을 받고 있는 상반신은 하?다. 

쇠꽃별처럼. 

(…) 눈썹은 소복했고 이마는 희고 맨들맨들, 튀어나와 있었다. 소녀가 아니라 혹 소년인가. 짧게 커트한 머리칼은 윤이 났다. 갸름한 목선을 타고 흘러내린 정맥이 푸르스름했다. (…) 팔걸이에 걸쳐진 양손과 팔은 어린아이의 그것만큼 가늘었다. 콧날엔 담방울이 송골, 맺혀 있었다. (…) 애처로워 보이는 체형에 비해 가슴은 사뭇 불끈했다. 한쪽 가슴은 오그린 팔에 접혀 있고, 한쪽 가슴은 오히려 솟아올라 셔츠 위로 기웃, 융기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라고 나는 말하지 않을 작정이다. 가능한 대로 나는 ‘사실적’으로 고백하고 싶다. 보고 만질 수 있는 말들의 조합을 사실적 문장이라고 한다는 것은 너도 알 테지. 네가 순결하고 착하고 싶고 빛난다고 나는 늘 생각해왔지만, 그렇게 모호한 어휘들로 내 사랑을 설명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내가 왜 네게 빠지게 됐는가를 종일 생각하다가 먼저 떠오른 것은, 너의 손이다.

 내가 처음 보았던 너의 손은,

 우리 집 데크의 내 흔들의자 팔걸이에 자연스럽게 놓여져 있었다. 네가 산책하던 중 내 집에 들어왔다가 무심히 그 의자에 앉아 잠든 날 보았던 손이다. ‘놓여져’ 있었다는 내 표현에 주목해다오. 그것은 네 의지로 네가 내려놓은 손이 아니었다. 우연히, 그곳에 놓여져 있었다. 소나무 잔가지 흰 그늘이 정물 같은 너의 손등 위에서 고요히 그네를 타고 있었지. 상앗빛 손가락들은 아주 가늘었고 손등엔 수맥처럼 연푸른 핏줄이 가로질러 흘렀다. 너의 팔목은 겨우 손가락보다 조금 굵은 것 같았어. 나는 한참이나 그것을 세세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팔목으로부터 장지와 약손가락 사이로 흘러가는 핏줄은 도드라져 보였지. 지금이라도 네 손등 위의 그 핏줄을 살펴보렴. 그 핏줄 가운데쯤, 작은 매듭 같은 부분이 있을 게야. 마치 어린 새싹처럼 살짝 솟아오른 피돌기 부분. 내 가슴이 갑자기 두근거리기 시작한 것은 핏줄의 그 매듭이 뛰고 있다고 알아차렸을 때였다. 나는, 환호했다. 그 손등 위의 맥박은,

 울근불근,

 아주 고요하면서도 힘차게 뛰고 있었다. 네 심장이 뛰고 있는 것 같았지. 아니, 쌔근쌔근 바람 부는 네 코의 피리, 푸르스름하고 가지런한 네 속눈썹 그늘의 떨림, 맑은 물 고인 네 쇄골 속 우물, 오르락내리락 시소를 타고 있는 네 가슴의 힘찬 동력, 휘어져서 비상하는 네 허리의 고혹을 나는 보고 느꼈다. 내가 평생 갈망했으나 이루지 못했던 로망이 거기 있었고, 머물러 있으나 우주를 드나드는 숨결의 영원성이 거기 있었다. 네가 ‘소녀’의 이미지에서 ‘처녀’의 이미지로 둔갑하는 순간이었다.” 


- 컨텐츠팀 에디터 현선 (anejsgkrp@bandinlun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