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부》 - 옛날이 저무는 동안 책, check, 책


“우리 엄마는 아마 옛날이란 소리를 하루에도 스무 번은 더 하시는 것 같아요.” 딸이 같이 간 일행에게 웃으면서 말했다. (…) 어떤 때는 작년 일도 옛날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맛있는 건 덮어놓고 다 옛날맛이라 하고, 사람도 좀 진국이거나 예의바르다 싶으면 나이에 상관없이 그 사람 옛날사람이라고 말해버린다. (…) 할머니나 노인 소리는 듣기 싫어하면서 옛날사람이라니. 옛날사람이면 늙은이보다도 더 오래된 사람이 아닌가. 나는 현란하게 흥청대는 첨단의 소비문화 한가운데서 미아가 된 것처럼 우두망찰했다. 그때 그 미아의 느낌은 공간적인 게 아니라 시간적인 거여서 어딜 봐도 귀로나 출구가 보이지 않는 막막하고 절망적인 것이었다.
(67쪽)

2000년에 쓴 글이다. 이후 2011년, 박완서는 팔십 년 작가의 생을 마감했다. 지난 1월에는 1주기를 지났다. 때 맞춰 여러 출판사에서 선생의 책을 출간했다. 이런 전집류에는 쉽게 손이 가지 않는다. ‘박완서’라는 이름이 벌써 저 먼 옛날로 물러나버린 것 같아서다. 사실 나는 그 이름을 열성적으로 찾아 읽지는 못했으나, 생전에 출간한 책 한 권은 가지고 있다. 산문집 《두부》다. 이 책은 1900년대부터 2000년 초까지 쓴 선생의 산문 스물세 편을 묶었다. 4부 구성에 각각 ‘노년의 자유’, ‘아치울 통신’, ‘이야기의 고향’, ‘사로잡힌 영혼’과 같은 제목을 붙였다. ‘노년’이나 ‘고향’과 같은 단어에서 느껴지는 바와 같이 《두부》에는 옛날을 돌아보는 선생이 있다.

행이나 불행이란 잣대로는 잴 수 없는 내 유년기의 완벽한 평화는, 그러나 언제고 거길 떠날 수밖에 없다는 상실의 예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을까. 마치 요람 속의 평화처럼. (…) 내 마음은 너무 오래 정처없이 떠돌았다. 나도 임의로 할 수 없던 내 마음이 언제부터인가 유턴을 해서 시발점으로 돌아가려 한다는 걸 요즈음 생생하게 느끼고 있다. (70쪽)

그러나 잎을 다 떨군 우리 마당의 살구나무는 하늘 향해 쭉쭉 뻗은 가장귀들이 미동도 안한다. 저 나무가 하루도 같은 날이 없이 변화무쌍하던 그 나무일까. (…) 한때의 영화는 속절없이 가버렸고, 속절없이 가버린 것은 나의 군더더기일 뿐 전체는 아니라고 주장이라도 하듯 마지막 남은 전체는 한점 흐트러짐도 흔들림도 없다. 나무를 닮고 싶다. (98쪽)

선생은 일제 식민 치하에서 태어나 6.25 전쟁과 4.19 혁명을 경험했다. 그 과정에서 피붙이의 죽음을 지켜보기도 했다. 선생은 “살아남은 슬픔과 치욕을 희석하여 견디기 수월하게 하려고 소설을 썼다.”라고 말한다. 모든 옛날을 현재형의 소설로 불러낸 것이다. 그러나 《두부》에 이르러 옛날은 원경으로 한 발짝 물러나 있다. 삶보다 죽음이 더 가까웠기 때문일까. 선생은 집단에서 개인으로 돌아왔다. 작가의 날이 무뎌졌다고 해도, 이를테면 내 마음은 너무 오래 정처없이 떠돌았다는 고백에서 오히려 위안을 받는다. 이만큼 알고도, 이만큼 살고도, 사람은 결국 미완의 사람으로 죽는 것이다. 선생이 남겨둔 여분의 증언은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 되었다. 그리하여 ‘박완서’는 현재형의 이름이다. 이 책을 읽고, 옛날보다 앞날을 바라보는 자들 또한 있으므로.

- 컨텐츠팀 에디터 희진 (hebong2000@bandinlun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