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응의 건축》 - 말하는 건축가, 감응에서 태어나다 블로거, 책을 말하다

 

정기용 | 《감응의 건축》 | 현실문화 | 2008 

 

서문의 첫 머리, 첫 문장부터 거침없이 내 가슴을 쓸어 내렸던 한 권의 책에 관하여...

필자는 첩첩산중, 내륙의 작은 도시 무주에서 1996년부터 10여 년 동안 크고 작은 공공건축물 설계작업에 매달린 적이 있다. 면사무소부터 납골당까지, 무려 30여 개의 건축을 다루는 일은 행운이면서 동시에 고난의 행군이었다
.
(6쪽, 저자의 서문 中에서)

10년이라는 세월이 초단위로 환산되면서 모래같은 시간의 알갱이들이 와르르 엄습해왔다. 가슴을 쓸어 내리는 느낌도 분명 이 모래 알갱이 같은 시간의 낙하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이토록 시간의 무게가 절절했던 까닭은 공교롭게도 머나먼 타국의 낙후된 도시에서 500여 일간의 파견근무를 마친 후 이 책과 만났기 때문이다. 말이 쉽지 대도시의 편의와 가족을 떠나 산골짜기 농촌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다. 그것도 평범한 일상생활이 아니라 일개 시(市)를 맡아 그곳의 공공건물들을 설계한다는 것은, 그리고 관(官)을 상대로 그 작업을 해나가야 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최대치의 열정과 인내를 요구하는 일이며 저자의 표현 그대로 '고난의 행군'임에 틀림이 없다. 하지만 그는 이 고난의 행군을 한편으론 '행운'이라고 불렀다. 결코 만만한 시간이 아닌 10여 년의 세월을 첩첩산중에서 30여 개의 공공건축물과 씨름하며 보냈던 그가 이를 행운이라 부르는데 더 이상 무어라 항변할 수 있을까, 그저 존경스러울 밖에. 남은 것은 숙연한 마음으로 한 건축가의 혼이 누적된 10년의 세월을 조심스레 들춰보는 일밖에 없었다.

《감응의 건축》은 한 도시와 한 건축가의 성장의 과정을 고스란히 담은 생생한 일대기이며 건축을 너머 사회와 환경 전반에 울림이 되는 소중한 발언들이다. 얼핏 보면 무주시 프로젝트에 관한 작품집 같지만 건축가 한 개인의 '작품'보다는 농촌문제, 건축행정, 민주주의, 자연과 생태에 더 주목하고자 하며 언변에만 그치는 이상적인 메시지가 아니라 경험 속에서 우러난 실천 가능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것이 지금은 고인이 되신 저자, 건축가 정기용 선생의 한결같은 건축생애의 행보이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건축가 누구' 하면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한다. '어떤 어떤 건물을 설계한 사람'이라고 해야 겨우 그 건축물의 인지도에 따라 '아~!'하는 동의나마 얻을 수 있다. 정기용 선생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비록 그가 건축계의 저명인사라 할지라도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봉하마을 사저'나 '기적의 도서관'을 들지 않고는 대중들에게 소개할 길이 없다. 그런데 이같은 건축가들의 인지도에도 불구하고 얼마 전 그의 건축생애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말하는 건축가>가 개봉돼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CEO든 학자든 예술가든 '듣는' 것을 미덕으로 강조하는 요즘 세상에 굳이 '말하는' 자를 자처하며 나섰던 그가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다름아닌 우리의 건축과 인간과 자연이 당면하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들이었으며, 대장암 말기로 생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한 건축가의 사회를 향한 간절한 유언이기도 했다. 그리고 《감응의 건축》은 바로 그 말들이 비롯된 선생의 건축적 경험과 소신의 산실을 기록한다.

‘감응의 건축’은 정기용 선생에게 있어 모토(motto)와도 같은 중심개념이다. ‘말하는 건축가’로 알려지기 이전부터 그는 늘 ‘감응의 건축가’였으니까. 여기서 감응이란 쌍방적인 것, 느끼고 응하는 것, 영어로 하면 ‘correspondence’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를 한자로 풀이하면 ‘생성’의 의미가 드러나면서 좀 더 오묘한 맛을 느낄 수 있다.

감응을 한자로 표현한다면 ‘어질 인(仁)’자에 가장 가까울 것이다. ‘어질 인’자는 사람이 둘이다. 사실 ‘어질 인’자에는 ‘생성’의 의미가 있다. 은행나무 열매를 행인(杏仁)이라고 하는데, 열매를 인(仁)이라고 쓰는 것은 감응해서 싹을 틔우기 때문이다.
(330쪽)

감응해 싹을 틔운 것. 그것의 참 모습을 집약해 보여주는 것이 바로 무주 프로젝트이다. 여기서는 자연, 시간, 기관, 주민, 건축가가 서로 소통하며 모두를 위한 30여 개의 공공건축물들을 탄생시켰다. 설계를 의뢰했던 무주군수부터 공공건축과 행정에 대해 남다른 의지를 가지고 있었고, 건축가는 그와 함께 주민들의 의견을 직접 묻고 귀로 들었으며, 콘크리트와 아파트로 대변되는 근대건축이 밀어내 버린 자연과 시간을 건축 환경 속에 다시 회복시켰다. 일례로 애초에 계획했던 주민자치센터(면사무소)는 주민들의 요구에 따라 여타 자치센터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목욕탕을 포함하기로 했다. 모든 주민들이 입을 모아 하는 말이 “면사무소는 뭐 하러 짓는가? 목욕탕이나 지어주지.”였고, 목욕을 하려면 봉고차를 빌려 대전까지 다녀오는 것이 그들의 상황인데 어찌 천편일률적인 자치센터의 시설을 고수할 수 있겠는가! 뿐만 아니라 공설운동장의 경우에도 주민들의 뼈아픈 충고가 그대로 반영되었다. 공설 운동장에서 행사를 할 때면 주민들이 오지 않아 그 이유를 알아보니 “높으신 분들만 그늘에 앉아 있고 우리들은 땡볕에 나 앉아 있어야 하니 가고 싶지 않다”는 것이 그들의 답변이었다. 그래서 공공건물의 권위주의를 벗겨내고 사람뿐만 아니라 자연이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공간을 위해 시도한 것이 등나무 그늘막이다. 그늘막을 위한 구조는 평범한 철골로 토대를 세우고 여기에 시간이 지나면서 등나무가 자라나 타오르게 만든 것이다. 등나무가 자라 철골구조를 다 덮으면 친구처럼 서로의 굵기도 엇비슷해지고 그늘은 기성품 천막으로는 절대 만들 수 없는 천연의 휴식처를 제공한다. 뿐만 아니라 계절에 따라 그늘막의 풍경도 달라지고 일년에 한 계절은 꽃 향기까지 맡을 수 있으니, 이보다 아름다운 민(民)의 공간이 또 어디 있을까!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은 (비록 정기용 선생 스스로 조금 비약적이라 표현했지만) 건축이 사회적 제안임을 확인시켜주었고, 감응을 통해 다원적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무주시는 보기 드물게 우리나라의 옛 풍경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농촌이니만큼 여기서 농촌문제가 대두되지 않을 수 없다. 언제부턴가 투기의 대상이 되어버린 농촌의 토지, 농촌 개발이라는 구호를 앞세우고 밀려드는 신도시, 공장, 골프장들…자본주의 체제에서의 농촌은 더 이상 농민의 것이 아니라 부를 소유한 큰 손들의 것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더 안타까운 문제는 농민들의 땅에 대한 인식과 정체성마저 침식당했다는 점이다.

…농촌 사람들에게 개발의 개념이란 땅값이 오르면 땅을 팔고 도시로 떠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85쪽) 

이러한 현실의 문제에 대해 정기용 선생은 건축가가 사회적 코디네이터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건축이 맞선 복잡하고 다양한 사회의 문제점들을 향해 수많은 분야들을 끌어안고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건축가는 설계자이기 이전에 세상에 대한 번역가이고, 세상을 읽어주는 사람이고, 사회를 제안하는 사람”이라고, 그는 당차게 말한다. 앞서 언급한 농촌문제의 경우도 단지 도시와 같은 생활의 편의를 그곳에 옮겨 심는 것이 아니라 국토개발이나 건축행정, 지역성 등의 관점에서 그들의 미래까지 아우를 수 있는 제안이 필요한 것이다. 

《감응의 건축》은 공공건축 프로젝트에 관한 이야기이므로 건축의 사회적인 측면들을 많이 언급하지만 각각의 건물에 함축된 아름다운 의도와 그것을 이끌어나갔던 사유의 자취 또한 빼놓을 수 없다. 하늘의 질서를 따르기로 했다는 부남면의 건물들, 망자로 하여금 마지막으로 마을을 돌아보도록 창을 만든 무주 보건의료원, 최재천 교수를 쫓아다니며 배운 곤충과 식물과의 공생관계를 적용한 곤충박물관, 이 밖에도 자연과 현실과 미래를 고민한 많은 건물들의 이야기가 책 속에 펼쳐진다. 그리고 이 모든 생각들은 “문제도 이 땅에 있고, 그 해법도 이 땅과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있다”라는 커다란 명제 아래 치열하게, 때론 포근하게 진행된다. 평소 해외 건축사조와 건축철학을 답습하며 늘 선진사례, 선진사례, 하는 것을 염려했던 선생이었기에 이 땅과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 의해 이 땅의 것을 만들어 내려는 의지가 더 생생하게 다가오는 듯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기용 선생은 삶의 여정을 마무리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고맙습니다, 여러분. 그리고 나무, 바람, 하늘, 공기, 모두 다 고맙습니다."

처음엔 그저 생을 마감하는 이가 고맙다는 말씀을 남겼기에 어쩐지 가슴이 찡했지만 나중에 문득 이 책을 떠올리고 나니 보다 확실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가 자연의 이름을 하나 하나 불러가며 모두에게 고맙다고 했던 것은 이생을 통해 그들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자신의 건축을 함께 만들어나갔던 친구였으며, 스승이자 조언자이기 때문이었다. 《감응의 건축》은 정기용 선생이 자연과 인간을 통해 가장 많은 것을 배웠던 행운과 고난의 10년을 살뜰하게 기록해 우리가 가야 할 지점까지 작은 오솔길을 만들어 놓았다. 그 길을 걷다 보면 그가 말했던 모든 것들이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그리고 그 말보다도 더 많은 습작들이 우리의 열정을 인도할 것이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이향치'님은?
그래도 길치나 방향치가 아님을 다행으로 여기고 언제나 낯선 곳에서 헤매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스무고개 같은 인생을 굽이굽이 살아가는 사람. 단, 스무 살은 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