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는 것들을 사랑합니다》 - 사 학년 육 반 임길택 책, check, 책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오 학년 삼 반이요.”
“어머, 나도 오 학년인데.”

어느 식당에선가 들었던 대화다. 오십삼 세나 쉰셋이 아니라 오 학년 삼 반이라니. 재미난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보니 이 말은 흔하게 통용되고 있었다. 특히 중년이라 불리는 어머니들 사이에서. 학생 티를 벗은 지 얼마 안 된 나로서는 스스로 칭하기를 ‘몇 학년 몇 반’이라는 것이 낯간지럽게 느껴진다. 이 기저에는 배울 거 다 배웠다는 오만, 그럼에도 내 나이의 가치를 확신하지 못하는 자괴, 고속으로 지나가는 시간에 대한 무력 같은 것이 뒤섞여 있다. 그에 비하면 어머니들은 명쾌하게 받아들였다. 인생이란 만년 학생으로 사는 것이며 본인은 오 학년 삼 반이라는 사실을.

말하자면 학교는 인생의 대유(代喩)쯤 될 텐데, 요즘 뉴스에서 접하는 일부 학교는 제구실을 못하는 것 같다. 선생이 학생을 때린다. 학생도 선생을 때린다. ‘스승과 제자’가 아니라 ‘스승 대 제자’라고 할만하다. 어떤 선생은 수리영역 1등급을 원한다. 어떤 학생은 (같은 학생에게) 이른바 ‘상납금’을 원한다. 학업 및 폭력을 비관하는 청소년 자살률 세계 1위라는 기록을 세웠으니 말 다 했다. 앞서 밝혔듯이 이것은 몇몇 ‘특수한 경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특수한 경우’가 나머지를 물들여 버릴 수 있다. 그 어두운 가능성을 무력화하려면 먼저 바뀌어야 하는 쪽은 선생(으로 대표되는 어른)이다. 예나 지금이나 어른이 하는 양을 보고 배울 뿐, 아이는 죄가 없다. 그렇다면 잘못된 어른은 누구에게 배워야 할까. 여기 한 선생님이 있다.

임길택 선생님. 《나는 우는 것들을 사랑합니다》에는 선생님이 탄광 마을과 산골 마을에서 아이들을 만났던 기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산수 시간만 되면 멍청히 앉아 있는 때가 많은 영근이”가 산에서 짐승들의 길을 읽는 것을 보고는 “영근아, 교실에서는 내가 선생이지만, 들에서는 니가 내 선생이다. 봐라, 사람마다 자기가 잘하는 것이 분명히 있단다.”라고 말해주는가 하면, “집에 오니까 할머니와 아버지가 싸움을 하였다. 나는 처음에는 조금 말리다가 안 되어 밖으로 나갔다. 숲에서 혼자 가만히 누워 있었다.”라고 쓴 아이의 일기를 검사하며 “그 아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행여 죽어 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해 보진 않았을까? 그랬을 때, 이제까지 무심한 것만 같았던 하늘, 구름, 나무들이 그게 아니라면서 참으라고 달래 주지는 않았을까?”라며 그 여린 속내를 헤아리는가 하면, 돈벌이 때문에 마을을 떠나는 아이들에게 “이 세상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결코 남을 해치려 하지 않고, 굶어 죽지 않을 아이들이라 여긴다.”라는 믿음을 보내기도 한다. 임길택 선생님은 가르치려들기보다는 듣고자 한다. 몰이해의 어른들이 판치는 요즘 같은 때에 이해(란 불가능하다지만)를 구하는 자세는 얼마나 값진가.


1997년 폐암 선고를 받은 임길택 선생님은 그해 12월에 세상을 떠났다. 당시 마흔여섯, 그러니까 사 학년 육 반이었다. 교단에서 아이들을 내려다보는 선생이 아니라 매순간 배우는 만년 학생의 자세로 살아왔기에, 나는 그 어른을 기꺼이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임길택 선생님은 인생을 그만 졸업하고 말았지만 남긴 것이 있다. 아래 서문만으로도 어른을 위한 교재로 충분한 책 한 권.

나는 누가 울 때, 왜 우는지 궁금합니다.
아이가 울 땐 더욱 그렇습니다.
아이를 울게 하는 것처럼 나쁜 일이 이 세상엔 없을 거라 여깁니다.
짐승이나 나무, 풀 같은 것들이 우는 까닭도 알고 싶은데,
만일 그 날이 나에게 온다면, 나는 부끄러움도 잊고 덩실덩실 춤을 출 것입니다.
나는 우는 것들을 사랑합니다.
 

- 컨텐츠팀 에디터 희진 (hebong2000@bandinlunis.com)